원로 작가들의 구도적 추상..엄태정·송번수·정창섭 개인전
(서울=연합뉴스) 김준억 기자 = 변형이 절제된 금속판. 나무 가시가 붙은 단색 화면. 닥나무 속껍질만 붙어 있는 캔버스.
청년 시절 격정적 추상에 심취했던 작가들이 노년에 선보인 작품들은 단순함 너머로 깨달음을 담아낸 듯하다.
원로 작가 엄태정(84)과 송번수(79), 고(故) 정창섭(1927∼2011) 화백의 구도적 추상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회가 잇따라 개막한다.
아라리오뮤지엄은 가을 기획전으로 엄태정 개인전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을 24일부터 내년 2월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신작을 포함해 발표되지 않았던 1960년대 초기작 등 조각과 드로잉 19점을 선보인다.
한국 대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공간사옥 지하의 소극장에 자리한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알루미늄판 사이에 철제 타원형 고리가 끼워진 작품을 마주한다.
올해 제작한 이 작품의 제목은 전시 제목과 같다. 수직과 수평, 면과 선, 은빛과 검정이 조화를 이루며 음과 양, 시간과 공간의 공존과 어울림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 작품에 부치는 시에서 "(전략) 은빛 두 날개는 무한한 사이를 품고 있습니다 / 태양과 달도 / 밤과 낮도 모두를 품습니다 (후략)"라고 노래한다.
이 공간에 세워진 '철의 향기'도 올해 제작한 작품으로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형태다. 철판 2개를 'U'자 모양으로 구부리고, 직각으로 연결하는 부위에 구리를 사용했다.
엄태정은 서울대 조소과 재학 시절 철의 물질성에 매료돼 금속조각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콘스탄틴 브란쿠시(1876∼1957)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다.
브란쿠시에게 조각은 참다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정신적 수행이자 명상의 시간이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조각은 치유의 공간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작품은 그 끝에서 얻은 깨달음의 결과라고 한다.
엄태정이 1960년대에 선보인 초기 작품들은 격정적인 앵포르멜(비정형 미술) 경향을 보였지만, 노년에 선보이는 최근작은 고요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조각 외에도 대형 캔버스에 가는 펜으로 점을 찍듯 면을 채워가는 수도자의 고행과 같은 평면 작품도 전시한다.
갤러리바톤은 반세기에 걸쳐 화업에 매진하는 송번수 화백의 개인전 '네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를 23일부터 9월 24일까지 개최한다.
그는 전업작가 초기인 1970년대 초에는 판화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발표한 실크스크린 작품 '공습경보'는 한국 팝아트의 효시로도 여겨진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는 태피스트리 전시를 보고 깊이 감동해 직조 방법을 배우고 태피스트리 작가로도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번 전시에선 대표작인 나무 가시를 모티브로 한 '가능성'(Possibility) 연작 등 24점을 선보인다.
그는 판화 작업 때 장미를 자주 표현했는데 유학 시절 퐁피두센터에서 현대미술 작품들을 많이 보고서 꽃을 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장미에서 가시만 남게 되니까 장미의 실체가 가시인 것 같았다"며 "그리고 가시에 많은 철학이 들어 있어 지금까지 작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수의 면류관에서 착상한 가시는 전쟁, 사회적 갈등, 피폐함 등에 대한 도상적 은유로 확대된다. 이라크 전쟁의 참상을 그린 2006년 작 태피스트리는 탄흔처럼 가시에 뚫린 천을 표현했다.
작가는 집 주변의 장미나 탱자나무의 가시를 떼어 캔버스에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최근에는 가시의 형태를 키워 나무로 조각한 것을 쓰기도 한다. 작가는 큰 가시는 도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가시 연작의 제목을 'Possibility'로 붙이는 것과 관련해 "모든 인간은 평생 가능성을 향해서 달려간다"며 자신의 작업은 관객의 눈길을 잡을 수 있도록 끝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PKM 갤러리는 한국적 추상화를 정립한 작가로 평가되는 고 정창섭 화백의 작품전을 25일부터 10월 15일까지 개최한다.
정창섭은 전위미술을 지향하던 작가들이 모인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출품하는 등 평생 추상 작업에 몰두했다. 전후 작품에선 불안과 상실을 표현하는 엥포르멜 경향을 보였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선 1980년대 초부터 닥나무 껍질을 붙여 한지 자체가 작품이 되는 '닥' 연작과 1990년부터 시작한 '묵고(默考)' 연작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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