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130여년 전 동학농민군이 달려온다

노형석 2022. 8. 2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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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아니다.

19세기 말 외세의 침탈과 조선 지배층의 학정에 맞서 봉기한 동학농민혁명군이 첫 승리를 거둔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모습을 드러낸 130년 전 장삼이사 농민군 600여명의 청동 군상은 21세기인 지금 보통 한국인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불멸―바람길> 은 한국 구상조각계에서 최고 실력파 작가로 꼽히는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임영선 가천대 교수가 지난해 정읍시와 전봉준장군동상재건립추진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올해 초까지 약 1년간 고증을 거듭하며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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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청동 군상
정읍시 등 의뢰로 임영선 교수 제작
1년간 600명 시민 얼굴 채워넣어
행렬 人자 모양..동상 수평배치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청동 군상 <불멸-바람길>. 노형석 기자

영웅이 아니다.

불굴의 투지로만 똘똘 뭉친 전사들도 아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뛰쳐나온 촌사람들이었다. 눈을 치켜떴지만, 표정은 복잡하다. 동공에는 곧 닥칠 전투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서려 있었다.

19세기 말 외세의 침탈과 조선 지배층의 학정에 맞서 봉기한 동학농민혁명군이 첫 승리를 거둔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모습을 드러낸 130년 전 장삼이사 농민군 600여명의 청동 군상은 21세기인 지금 보통 한국인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불멸―바람길’이란 제목을 달고 지난 6월 중순 전적지 기념공원 안 가로 30m, 세로 22m 크기의 광장에 새로 들어선 동학농민혁명군의 군상 조각은 세간에서 흔히 아는 위인·영웅 동상의 전형을 과감히 깨뜨린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청동 군상 <불멸-바람길>. 노형석 기자

<불멸―바람길>은 한국 구상조각계에서 최고 실력파 작가로 꼽히는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임영선 가천대 교수가 지난해 정읍시와 전봉준장군동상재건립추진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올해 초까지 약 1년간 고증을 거듭하며 만들었다. 1894년 1월 고부 봉기를 계기로 분연히 일어난 농민군이 이 땅의 북도와 남도에서 각각 행렬을 이루면서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하나의 대열로 합쳐지는 장관을 부조, 투조, 환조의 기법을 활용해 만든 600여명의 거대한 군상 조각이다. 이 상은 국내 동상들에서 획일적으로 보이는 높고 권위적인 좌대가 없고 약간 솟은 기단만 있을 뿐이다. 누구든 기단 위에 올라가 행군하는 농민군의 대열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거기서 굳은 결의와 피로감과 불안이 섞인 표정으로 조총을 등에 메고 걸어가는 각양각색 복색의 장정들과, 소를 끌고 가는 노년의 촌로, 그리고 아이를 안은 아낙과 장정들이 마실 물동이를 들고 가는 소녀와 죽창을 들고 행렬을 선도하는 소년병의 모습을 지금 현실 속 현대인들의 또 다른 얼굴처럼 접하게 된다.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청동 군상 <불멸-바람길>. 노형석 기자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청동 군상 <불멸-바람길>. 노형석 기자

작가는 남도와 북도의 농민군 대열이 합쳐지는 양상을 사람인(人)의 모양새로 만들었다. 행렬의 선두에 선 전봉준 장군 외에 다른 농민군의 얼굴은 오늘날 특정되지 않은 일반인의 얼굴들로 채워 넣어 관람객들이 현실처럼 몰입할 수 있게 했다. 갓을 벗어버린 전봉준 장군 동상과는 별개로 뒤를 따르는 김개남 등 동학군 주요 지도부의 모습은 바로 이런 익명의 군상으로 처리했기에, 판에 박힌 전형성을 벗어나게 된다. 봉건 질서를 혁파하려는 농민군의 열망이 평범한 군상의 용모를 통해 더욱 강렬하게 증폭되어 전해지는 셈이다.

또 전봉준 장군 동상의 크기를 뒤따르는 농민 군상들과 거의 차이를 두지 않고 같은 평면에 나란히 놓아 시대적 질곡을 함께 겪는 동등한 인간의 무리임을 드러낸 구도도 인상적인 부분이다. 갓을 벗어 손에 들고 앞을 향해 힘주어 발길을 내딛는 전봉준의 풍모 또한 신분 차별을 없애고 사회적 모순을 걷어내려는 혁명가의 면모를 형상화한 창의적 표현으로 비친다.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청동 군상 <불멸-바람길>. 노형석 기자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청동 군상 <불멸-바람길>. 노형석 기자

조각사에서는 근대 동상의 기념비적인 전형을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손을 높이 든 모양으로 조각한 상과 여기에서 영향받은 15세기 거장 도나텔로의 <가타멜라타 기마상>에서 찾는다. 이 도식적 계보를 20세기 초·중반부터 국내 동상들은 무수히 답습해왔다. 하지만 임 작가의 군상 작업은 이런 관행을 벗어던지고 오늘날 인간 풍경과 다를 바 없는 당시 농민군 실상을 수평적 구도로 잡아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형을 세웠다. 작가는 “동학농민혁명은 쌀을 얻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일어난 의로운 싸움이었고, 승패를 떠나 농민군의 산화 그 자체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역사와 이어지는 사건이었다”며 “이런 동학농민군의 본질을 생생하게 작품에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읍/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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