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양심이 남긴 한국 잡채 레시피
취재차 일본을 자주 가던 2018년의 일이다. 더운 여름이었다. 오사카의 어느 작은 선술집에 들렀다. 일본의 선술집은 문자 그대로 서서 마신다. 대신 싸다. 서서 마시니까 빨리 회전된다. 하여튼 그런 가게였는데, 메뉴에 잡채가 있었다.
한국 같으면 기본 찬으로 내줄 음식도 일본은 다 돈을 받는다. 콩 몇 쪽에도 요금이 붙는다. 김치는 보통 500엔(약 4900원) 이상이다. 그 가게 잡채가 350엔인가 했다. 주문했더니 미리 만들어둔 잡채 한 줌을 철판에 데운다. 서너 젓가락 될까, 적은 양이었다. 맛도 이것 참. 한마디 투덜거렸더니 젊은 주인이 휙 쳐다본다. 동행한 현지인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오사카나 고베에선 조심해야 해요. 한국말 알아듣는 자이니치(재일교포)가 꽤 많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는 잡채를 파는 장한 자이니치였을 거다. 응원해도 모자랄 판에 음식 타박이라니. 계산하고 나가는데, 그가 쪽지에 자기 이름을 써서 주며 고개를 까딱한다. 같은 민족끼리, 뭐 그런 뜻이었을 거다. 정말 무서운 게 핏줄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잡채다. 고급 뷔페에 가도 잡채를 한가득 담는다. 뷔페 전문가들은 비웃을 일이다. 고급 뷔페에서 이익 보는 첫 번째 철칙은 “배부른 것은 나중에 먹는다. 그것이 탄수화물이라면 더욱”이다. 두 번째 철칙도 말씀드리자면, “뷔페는 코스 요리가 아니다. 애피타이저는 배에 자리가 남으면 먹고 무조건 고기와 해물부터 공략한다”이다. 하지만 철칙 따위! 나는 ‘잡채 바보’를 기꺼이 자임한다. 참기름 살살 바른 미끈한 당면 다발을 입 안 가득 넣어야 행복하다. 즉석에서 구워주는 양갈비나 등심구이도, 모둠회도 나중이다.
중국집에서 잡채에 배신당하는 사람도 많다. 고추잡채가 문제의 요리다. 고추잡채는 피망으로 만든 잡채라 당면이 한 가닥도 안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잡채=당면’이란 공식은 한국에서만 통용된다. 사실 오래전 한국(조선)에서도 잡채는 당면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요리였다.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당면 잡채가 생겨난 것 같다. 〈조선무쌍 신식요리제법〉이라는 일제강점기 무렵 한글 요리책이 있다. 잡채 만드는 법이 나온다.
‘도라지는 데친 뒤 빨아서 준비하고 미나리는 칠 푼 정도로 잘라서 기름에 볶고 또 목이버섯을 불려 넣고 고기와 제육(돼지고기)을 볶아 넣고 표고버섯을 채 쳐서 기름에 볶고 달걀을 노른자 흰자 분리해 부치고 전복과 해삼을 넣어 만든다.’ 수라상에나 올라갈 요리다. 그다음 대목에서 저자(이용기)는 의미심장한 한 줄을 더한다. ‘당면을 넣은 건 좋지 못하니라. 먹을 때는 겨자나 초장에 찍어 먹는다.’
아하, 그때 이미 시중에서는 잡채에 당면을 넣었다는 뜻이다. 일본 기업이 그 무렵, 식민지 조선 땅에 중국식 당면 공장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당면이 중국에서 이 나라에 들어오면서 음식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잡채가 그랬다. 나중에는 만두와 순대의 소가 되었다. 만약 당면이 없었다면 잡채나 만두, 순대 값이 꽤 비쌌을 것이다. 그래서 나름 고마운 당면이다.
윤동주 죽음에 “통한의 감정” 가져
이바라기 노리코(본명 미우라 노리코)는 1926년에 오사카에서 태어나 2006년 도쿄에서 타계했다. 일본에서는 매우 유명한 시인이다. 그이가 한국에 이름을 알리게 된 건 뛰어난 시 때문이기도 하지만 윤동주와 얽혀 있는 까닭이다.
이바라기 시인은 나이 쉰이 되던 1976년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까닭이 놀랍다. 한일 문인 교류 모임에서 홍윤숙 시인을 만나게 되는데, 홍 시인의 일본어가 하도 유창해 이유를 물었다. 홍 시인이 식민지배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라는 걸 들은 그는 충격에 빠졌다. 이바라기 시인은 그렇게 한글과 한국을 배우게 된다. 1976년부터 아사히 문화센터에서 한글을 수학하기 시작해 유창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나아가 한글 자체에 매료되어 관련된 수필을 여러 편 쓰기도 했다. 1990년에는 한국 시인 12명의 시를 골라 시선집을 번역 출간했다. 그 작업으로 1991년 요미우리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담아 〈한글로의 여행〉이라는 책을 냈다.
한국에도 번역돼 나온 이 책에 윤동주와 그의 시를 소개하는 수필 한 편이 있다. 그의 수필은 놀랍게도 1990년부터 일본 고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100만 부 이상을 찍었다고 한다. 이바라기 시인은 수필에서 “윤동주는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통한(痛恨)의 감정을 갖지 않고는 이 시인을 만날 수 없다”라고 했다. 알려진 대로,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졌다. 마루타 실험을 당했다는 말도 있다. 일본의 양심이기도 했던 이바라기 시인의 부채 의식이 작동했을 것이다. 이바라기 시인은 사후에도 가슴 찡한 뒷얘기를 남겼다.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부고장’을 보냈다.
“저는 (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뇌졸중)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장례·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집도 당분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니 조위금이나 조화 등 아무것도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 사람도 떠났구나’ 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괄호 안은 시인의 사후에 유족이 채워 넣은 것이다. 시인다운 결말이다. 이바라기 시인은 전쟁 중의 군국주의, 나중에는 극우적인 일본의 보수세력에 던지는 날카로운 비판을 삶의 최후까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이바라기 시인을 알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일본의 어느 서점 매대를 구경하다 좀 특이한 요리책 한 권을 발견했다. 〈茨木のり子の獻立帖(이바라기 노리코의 메뉴첩)〉(平凡社, 2017)이라는 책이었는데 그이가 남긴 육필 레시피를 토대로 만든 흥미로운 요리 모음집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그이가 그렇게 유명한 시인인지,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일화를 남긴 ‘지한파’였는지 전혀 몰랐다. 책을 사서 펼쳐 보는데, 한국 요리가 여러 개 등장하는 게 아닌가. 잡채, 지지미(부침개), 포항초 나물, 수정과…. 그렇게 나는 이바라기 시인이란 존재를 거꾸로 알게 됐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양심과 어느 한국의 요리사가 우연히 접속하게 된 셈이다.
그이가 남긴 잡채 레시피는 소고기, 달걀, 표고버섯, 당근, 통깨 등이 들어가는 평범한 방식이다. 당면은 일본에서 ‘하루사메(春雨)’라고 쓴다. 봄비처럼 가느다란 면이란 뜻이겠다. 양념에 특이하게도 국간장을 쓴다. 아마 한국에서 잡채에 일본식 진간장을 넣는 요리법이 대세가 되기 전의 레시피인 듯하다. 국간장을 넣는 잡채라. 육필 레시피를 보니, 그이는 잡채를 한글로 정확하게 적었다. 언젠가 이바라기식 잡채 한 그릇을 만들어봐야겠다.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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