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땅' 코카서스..노란꽃 들판을 달려 빙하를 걷다 [ESC]

한겨레 2022. 8. 2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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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김남희의 걷다 보면]김남희의 걷다 보면ㅣ조지아 트레킹
코카서스산맥에 위치한 조지아
메스티아~우슈굴리 55km 도보 여행
들풀과 노란 꽃 가득한 고갯길 걷고
산속 짙은 안개와 일출 풍경 감상
말을 타고 우슈굴리에서 슈카라 빙하를 향해 가는 ‘방과후 산책단’. 김남희 제공

20년 동안 질리는 일도 없이 여행만 하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을 꼽는다면 내가 뼛속 깊이 오늘만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제 본 것은 다 잊고, 오직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 어제 이구아수 폭포를 봤다고 오늘의 정방 폭포를 시시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실 기억력이 나빠 어제의 폭포를 세세히 기억할 수 없다는 점도 이럴 땐 유리하다. 눈앞의 풍경에 오롯이 몰두하고 주어진 것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기. 지금 내가 보는 풍경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고, 지금 이 식당의 음식이 최고의 진미라고 자신을 설득하기. 이런 세뇌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어떤 태도가 되어 몸에 밴다. 삶이 그러하듯, 여행도 비교하기 시작하면 피곤해진다. 집을 나서는 순간 고생은 시작된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빡빡한 일정에 피로는 쌓인다. 이럴 때 비교와 평가가 취미이자 특기인 사람이 동반자라면? 옆에서 도움도 안 되는 말을 자꾸 한다면? 상상만으로 한숨이 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늘 운이 좋았다. ‘방과후 산책단’(책임여행을 꿈꾸며 만든 여성 전용 여행단)에 오는 사람들은 방송국 알바 수준의 리액션과 감탄을 쏟아내며 매 순간 자신의 가장 선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으니.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에서 바라본 카즈베기 마을 전경. 김남희 제공

“당신의 원통함을 내가 아오”

조지아 트레킹을 위해 모인 사람들도 첫인상이 좋았다. 지난해 가을에 이어 두번째 트레킹이라 내 마음도 한결 편안했다. 스바네티 트레킹의 베이스캠프는 메스티아. 지난해 머물렀던 호텔에 도착하니 매니저 아나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큰 짐을 호텔에 두고, 코카서스산맥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지아는 싱그러웠다. 가을 트레킹의 주인공이 노랗게 물든 은사시나무였다면, 이번 트레킹의 주연은 들판 가득 피어난 꽃들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슈굴리까지 가는 55㎞ 3박4일의 트레킹은 매일 같은 식으로 이어진다. 봉우리 하나를 넘어가 마을에서 자고, 다음날 다시 고개를 넘어 다른 마을로 내려가기. 고도 2000m에서 2700m를 넘나들며 나흘간 걷는데 도중에 편의시설이라고는 없다. 민박집에 점심 도시락도 주문해야 한다. 민박집에는 영어를 못하는 부모를 대신해 통역을 돕는 자식이 하나씩 있다. 자베시의 민박집에서는 20대 청년 니콜라스가 그 주인공.

메스티아에서 연극배우로 일한다는 그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조지아 와인을 따라주며 말했다. “조지아 남자들은 강해요.” 그리고 원샷. 그러자 질 수 없다는 듯 한국 여자들도 술잔을 들며 답했다. “한국 여자들도 강해요.” 빈 잔이 테이블 위에 경쟁하듯 쌓여갔다. 저녁을 먹은 뒤 니콜라스를 따라 동네 산책에 나섰다. “여기는 우리 삼촌 집이에요. 여기는 할아버지 집. 그리고 여기는 둘째 삼촌 집이에요. 삼촌은 압하지야에 살았는데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진 뒤에 쫓겨났어요.” 조지아는 2008년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에서 국토의 20%를 잃었다. 그 전쟁으로 40만명의 난민이 생겨났는데 그의 삼촌도 난민이 되었다. 니콜라스가 돌탑 코슈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코슈키는 우리 가문에서 쌓은 거예요.” 짧은 동네 산책에 비극의 조지아 역사가 고스란히 따라온다.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 사이에 낀 조지아는 끝없는 외침을 받았다. 코슈키는 외침에 대비해 쌓아 올린 방어용 탑이다. 전쟁이 나면 식량을 들고 들어가 버티기 위해 만든 탑이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뒤 조지아의 청년들 3천여명이 우크라이나로 달려갔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제 연대다. 조지아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러시아의 다음 목표가 조지아라는 소문도 무성하다. 이 나라의 청년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남의 일로만 여길 수 없었을 것이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등이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을 위해 내걸었던 펼침막 글귀처럼.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여행은 결국 자기만의 세계사 교과서를 써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는 많은 경우 승리한 자의 시선으로 쓰인 일방적인 이야기일 수 있기에 여행을 통해 우리는 평소 만날 수 없었던 이들(패한 자, 소수자들, 경계인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삶을 듣게 된다. 역사책 안 익명의 존재가 아니라 이름과 목소리와 체온을 지닌 구체적인 인간으로 만나는 경험이다. 그런 시간이 쌓여갈 때마다 자신만의 세계사가 새롭게 쓰인다. 조지아인의 목소리로 조지아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조금씩 더 조지아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태양은 날카로웠지만 고도가 높아 바람이 서늘했다. 성수기인데도 트레일은 고즈넉했다. 이 아름다운 코카서스산맥을 걷는 이들은 우리를 빼면 스무명 남짓이 전부였다. 몸을 써야만 하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이렇게나마 내 몸의 육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고되면서도 뿌듯하다. 허벅지의 근육이 끊어질 것처럼 팽팽히 땅기는 오르막을 오르고 맨발로 얼음장 같은 계곡물을 건너고 땀을 쏟으며 가쁜 숨을 내뱉는 일. 그런 순간이면 내 몸이 제대로 기능을 해내고 있음에 안도하게 된다. 셋째 날 쏟아진 폭우로 물살이 불어난 계곡을 건너는 작은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남자들이 끌고 온 말 등에 올라 몇명이 냇물을 건너는 동안 나를 포함한 일부는 등산화를 벗어 강둑으로 던졌다. 바지를 최대한 걷어 올리고 발을 강물에 담갔다. 황토색 탁한 급류가 위협이라도 하듯 빙글빙글 돌며 휘몰아쳤다. 물살이 세서 몸이 휘청거렸다. 스틱을 잡은 양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허벅지까지 순식간에 차오르는 물살을 헤치며 계곡을 가로질렀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뿌듯한 기분이 드는지. 이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험의 최대치라 해도 좋았다. 저마다 작은 모험을 추구하며 산다면 삶이 조금은 더 재밌을 테니까.

“내 조국의 20%는 러시아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는 가이드. 김남희 제공
물살이 거센 계곡을 건너는 모습. 김남희 제공

생애 첫 트레킹이 코카서스!

이번 팀의 막내 엠(M)에게도 이번 트레킹은 모험이었다. 생애 첫 트레킹이었기에! 그의 트레킹 준비는 첫 등산용품 쇼핑으로 시작되었다. 신발이며 방수 잠바, 배낭과 스틱까지 다 장만했다. 내가 적어준 준비물 목록에는 당연히 등산용 긴팔 티가 있었다. 트레킹 첫날 긴 면티 위에 반팔 면티를 입은 그에게 물었다. “등산용 티셔츠 없어요? 면티는 땀 배출도 안 되고 젖으면 잘 안 마르는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항변했다. “이거 등산용으로 준비해 온 옷인데요? 작가님이 ‘등산용 긴팔 옷’이라고 적어 놓으셨잖아요.” “제가 잘못했네요. ‘등산용’이 아니라 ‘등산복’이라고 썼어야 했는데….” 다행히 일행이 여벌의 등산복을 빌려줘서 문제는 일단락. 그는 걷는 동안 가장 많이 감탄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첫 트레킹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짜릿한데 하물며 여기는 코카서스산맥이니! 트레킹의 종착지인 우슈굴리에서는 말을 타고 트레킹을 이어갔다.노란 꽃이 지천으로 핀 들판을 달려 슈카라 빙하로 향할 때는 고구려의 후예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트레킹을 마치고 메스티아로 돌아온 뒤 서둘러 찾아간 곳은 병원. 일행 중 한명이 코로나 자가 검사에서 양성이 나왔기 때문이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두명 확진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망연자실한 내게 숙소의 아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너희 팀에서 코로나 확진자 나왔지? 우리 호텔에 머물 수 없으니 바로 차를 빌려서 ‘코비드 호텔’(확진자 격리용 호텔)로 가줘.”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차가웠다. 이 산골에서 도무지 믿기지 않는 ‘엘티이(LTE)급 속도’였다. 영화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비가 쏟아질 때마다 빤한 클리셰라고 비웃었는데 현실마저 그랬다. 아나의 숙박 불가 통보를 받던 순간,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우리는 병원의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비를 그었다. 이제 어째야 하나. 트빌리시의 한국 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영사관에서는 5월부터 코로나 관련 규제가 다 해제된 상황이니 알아보고 메일로 답을 주겠다고 했다. 구글링으로 코비드 호텔을 찾는 동시에 ‘멘붕’에 빠진 일행을 다독여야 했다. 처마 밑에 쪼그려 앉은 우리에게 코로나 검사를 담당했던 의사가 다가왔다. 호텔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다고 하니, 그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조지아어 통화가 끝난 직후, 다시 아나에게서 걸려 온 전화. “오늘 밤은 머무르게 해줄게. 대신 로비나 식당으로 나오면 절대 안 돼. 아침 식사는 문 앞에 갖다 놓을 거야. 커피포트랑 일회용 컵도 내일 떠나기 전에 비닐봉지에 밀봉해서 다 버려줘.” 나는 빠르게 “예스 예스”, “오브 코스”를 외쳤다.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트빌리시로 향했다. 차량을 전세 낸 터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국 영사관에서 온 메일은 간단했다. “(코로나) 확진자 숙소는 독립 건물 권장.” 코로나 비상조치가 해제된 뒤라 가이드라인도 없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알아서 조심하며 남은 여행을 이어갔다. 확진자는 온천이나 수영장 이용 금지. 외식 자제 등의 룰을 만들었다. 다행히 그런 상황에서도 다들 서로를 배려했다. 모두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잃지 않았다. 그러니 아름다운 순간들이 종종 찾아왔다. 카즈베기산 근처의 주타 계곡을 트레킹할 때였다. 모두가 걷고 있을 때 시인인 케이(K) 샘은 그곳 산장에 혼자 남아 한편의 시를 썼다. 안개 자욱한 길을 걸어 사라지는 우리를 보며 지은 시였다. 장작 난로가 타오르던 산장에서 케이 샘이 읽어주는 시에 집중하던 그 시간, 창밖으로는 짙은 안개가 밀려왔다 밀려가며 수묵화를 고쳐 그리고 있었다. 카즈베기산의 일출을 보겠다며 하나둘 방에서 나와 베란다에 앉아 있던 이른 새벽도 그랬다. 고요한 침묵 속에 모두가 경이로움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던 시간이었다.

주타 계곡에서 안개 낀 산을 배경으로 점프샷을 찍는 일행들. 김남희 제공
장엄한 코카서스산맥으로 걸어 들어가는 메스티아~우슈굴리 트레킹. 김남희 제공

여행 끝말은 언제나 같다

트빌리시를 떠나 돌아오던 날 마지막 유전자증폭(PCR) 검사에서 세분이 양성 확진을 받았다. 우리 정부가 허락한 열흘 뒤에나 비행기를 탈 수 있어서 그들은 트빌리시에 남아야 했다. 남는 이는 물론이고 떠나는 이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도 남는 이들은 “우리 재미나게 놀다 갈게요”라며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떠나는 이들은 남는 이들의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거나 차와 간식, 약 같은 것들을 건넸다. 운이 나빴지만 이런 사람들과 함께여서 운이 좋기도 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코비드 시대의 여행은 고달프다. 그런데도 여행의 끝말은 언제나 같았다. “다녀오기를 정말 잘했어.”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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