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단체냐, 정치단체냐"..노조는 '정치'하면 안 되나

한겨레 2022. 8. 2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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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홍명교의 이상동몽][한겨레S] 홍명교의 이상동몽ㅣ'시민불복종' 선두 노동조직들
미얀마 군부 맞선 불복종운동, 노동조합이 구심점
민주노총 유사한 홍콩의 '직공맹' 민주화운동 앞장
"정치단체냐" 힐난에..'임금인상만 외쳐야 하나' 반문
지난해 5월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노동자 시위대가 ‘산업파업단’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지난해 2월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 민중들은 ‘시민불복종 운동’이라 명명된 목숨을 건 항쟁을 시작했다. 연방제 민주주의의 지연, 노동권의 전반적인 부재, 돈과 군사력을 모두 거머쥔 과두집단의 존속은 이들이 넘어야 하는 거대한 산이었다. 대도시부터 산악 마을까지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파업과 거리 시위가 이어졌다. 군부의 끔찍한 학살로 항쟁은 초기의 활력을 잃었지만, 저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항쟁이 1988년 민주화 시위나 2007년 사프란 항쟁과 차이가 있다면, 좀 더 거대하고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조직된 노동자들이 있다는 점이다.

불복종의 출발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이다. 쿠데타를 통한 군부의 복귀가 노동조건 악화와 노동조합 조직화에 대한 통제로 이어지리라 우려한 노동자들은 불복종의 최선두에 나섰다. 2월3일, 의료 노동자들이 시민들을 향해 모든 민중의 불복종 저항을 호소하고 나선 지 며칠 뒤, 흘라잉타야 공단의 봉제 노동자들이 일어섰다. 6일, 수천명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하고, 양곤 시내에서 행진했다. 미얀마일반노조연맹(FGWM) 조합원인 이들은 전국 파업을 촉진하고, 거리로 뛰어나오도록 용기를 북돋았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노동조합

병원과 공항, 항구, 철도, 광산 등에서 일하던 공공 및 민간 부문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동참했다. 노동운동가 코 마웅은 최근 사회주의 언론 <자코뱅>과의 인터뷰에서 “이 봉기는 엘리트들이나 고위 정치인들이 대중을 동원해서 발생한 게 아니라, 집단 토론을 통해 정치 파업을 결정한 봉제공장 노동자들 스스로 촉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년 일터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여성 노동운동가 마 모 산다르 민도 “모든 역경을 무릅쓰고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 싸우고 있다”며 “봉제노동자연맹의 여성들은 투쟁에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고 있다”고 말했다.

홍콩에서도 노동조합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제와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국의 민주노총과 유사한 성격을 띤 ‘직공맹’(職工盟)은 조합원 24만명 규모로, 친중 성향의 제1노총 다음으로 큰 조직이었다. 1989년 천안문 항쟁 당시 100만 홍콩 시민들이 연대했던 걸 계기로 결성된 직공맹은 애초부터 사회·정치적 의제와 노동권이 떨어져 있는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직공맹이 민주노총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19년 6월, 홍콩 항쟁이 촉발될 때부터 직공맹은 홍콩특별행정자치구의 범죄인 송환조례 개정 시도가 시민사회를 통제하고 민주주의를 위축시킬 것이라 경고했다. 6월9일 대규모 시위를 기획해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했고, 마침내 100만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며 1년에 걸친 항쟁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의 항쟁 참여가 돋보이기 시작한 건 50만 이상이 참여한 8월5일 파업부터다. 직공맹은 95개 산하 노조의 공동행동을 준비했고, 노조가 없는 시민들에게도 일손을 멈추자고 호소했다. 이날 파업은 항쟁 내 ‘왼쪽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고심하던 노동운동가들에게 호기로 작용했다. 이들은 조례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 도시를 멈춰야 한다고 여기던 시민들과 조우했다. 텔레그램에서 자율적으로 직종별 모임을 만들던 연극인과 사회복지사, 호텔리어, 공무원 등 여러 업종의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노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듬해 중국 정부는 강경파 인사를 통해 운동에 대한 전방위적인 탄압을 예고했다. 시간이 흐르자 항쟁은 위축되기 시작했고, 운동 양상은 지하철역 입구에 불을 지르는 극단적인 전술과 모든 시민의 노조 가입을 통해 ‘도시파업’을 실질화하는 갈래로 양분됐다. 비록 도시파업 투표는 당국의 방해와 협박으로 무산됐지만, 노동자들은 항쟁의 불씨를 잇기 위해 발군의 노력을 다했다.

지난해 9월, 결국 교사노조와 직공맹은 각각 48년, 31년 만에 조직을 해산했다. 홍콩에서 가장 큰 노동조직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공안당국이 친중파의 정치적 반대파였던 직공맹을 항쟁의 배후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직공맹의 부주석이었던 덩젠화는 해산 직후 이렇게 말했다. “훗날 노동운동이 다시 도모될 때, 노조의 목표엔 민주화가 포함되어야 한다. (…) 노동자들이 지켜온 모든 것은 곧 그들 자신의 것이니까.”

일찍이 한반도 땅의 노동운동 역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갈망과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정치적 열망이 혼재된 채 출발했다. 인도네시아 반둥의 농업 노동자들 역시 자신들의 역사가 네덜란드 식민 권력에 맞선 독립투쟁, 독재에 맞선 투쟁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중국 광둥성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몇년 전 체포됐던 노동운동가 장쯔루는 농민공들을 만나며 “노동자들이야말로 정치에 더 관심 갖고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며칠 전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민주노총을 향해 “노동자단체냐 정치단체냐” 묻고, “정치적 이슈에 개입해 불법파업으로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반사이익을 누리려는 정치운동 단체”라고 비난했다. 최근 민주노총은 거제 조선소 하청노동자 파업에 연대하기 위해 조직의 역량을 투여한 바 있다. 노조가 보편적인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거나 비정규직과 연대한다는 이유로 ‘정치적’이라 비난한다면, 대체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오직 자기 일터 이해에 갇혀 임금 인상만 요구하라는 걸까?

여전히 불충분한 사회적 노동운동

미얀마와 홍콩, 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 각국 노동자들의 외침은 노조가 정치적이고 사회운동적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번 8·15노동자대회에 아쉬움이 있다면, 여당이나 보수언론들의 비난처럼 ‘지나친 정치’가 아니라 ‘불충분한 정치’에 있다. 21세기 노동운동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세계 모든 노동자들의 목소리로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지닌 위험성을 정당하게 비판하려면, 중국의 군비 증강과 패권주의,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삐를 풀고 전세계 군비 증강에 기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방위산업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 점증하는 군사 경쟁과 전쟁 위기 속에서 만국 노동자의 평화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에는 20세기 냉전 시대를 보는 고정된 시야가 아니라, 21세기 정세에 적합한 아래로부터의 국제주의, 갱신된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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