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무·낮은 수가·고위험과 기피 가속.. "사명에만 기댈순 없다" [심층기획]

정진수 2022. 8. 2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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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의료체계 붕괴 위기
저출산 여파 소아청소년과 '이탈' 최다
2022년 전공의 지원율 28% 매년 반토막
20년째 인력난 흉부외과도 상황 심각
연차별 전공의 보유 병원 고작 5곳
소아심장 분야 전문의 25명 소멸 직전
과도한 업무에 번아웃.. 포기도 속출
인력난에 지역·병원간 의료격차 심화
대학병원 교수들도 '당직' 굴레 갇혀
"명맥 완전히 끊기면 회복 방법 없다"
의료계, 수가 개선 등 정부 지원 촉구
지난주 4일을 병원에서 보냈다. 당직을 위해서 이틀, 수술 후 환자 상태 확인을 위해서 이틀을 집에 못 갔다. 인력 부족으로 흉부외과는 교수가 당직 서는 게 ‘기본’이 돼버렸다.” - 서울 A종합병원 흉부외과 교수
 
“최근 3∼4년 새 병원에 젊은 전공의가 다 사라졌다. 지원자도 없고, 그나마 버티던 사람도 일이 너무 몰리니, 의원이라도 개원하는 게 낫다고 그만두고 있다. 그 공백을 메우는 건 늙은 교수들이다.” - 지방 B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전공의 지원자가 줄면 그 타격은 지방 인력 부족으로 바로 연결된다. 응급실이 24시간 문을 못 여는 경우들이 생기니, 어느 지역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새벽에 뇌졸중이 생기면 병원을 전전하다가 사망할 수 있다. ‘사는 곳’이 결국 ‘생명’과 연결된다. 이게 2022년 대한민국 현실이다.” - 서울 C대학병원 신경과 교수
 
의료계 특정 진료과를 선호하는 ‘쏠림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비선호’ 진료과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올해 각 병원 전공의 지원에서 일명 ‘내·외·산·소’라 불리는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은 0.3∼0.6대 1의 처참한 지원율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피·안·성·정·재·영’이라고 불리는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등 인기과는 모든 병원이 1.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문제는 지원율이 낮은 곳이 모두 수술·중환자실·응급실 등에서 생명 유지의 최전선을 지키는 ‘필수의료’ 분야라는 점. 의료계에서는 이로 인한 ‘의료 붕괴’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흉부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 필수의료 위기

가장 급속하게 전공의 ‘이탈’ 가속 페달을 밟는 분야는 소아청소년과다. ‘저출산’으로 인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이 줄어들던 차에 이대 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의 ‘직격탄’을 맞아 해마다 지원 규모가 반 토막 난 것이다. 전공의 지원율은 2020년 74%, 2021년 38%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는 27.5%까지 급전직하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올해 신입 1년 차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이 전혀 없는 병원이 전체 수련병원의 72%에 달한다.
‘붕괴 속도’에서 소아청소년과가 단연 1등이라면, 기간과 심각도 면에서는 흉부외과가 단연 1등이다. 인력난이 지속된 것만 20년이 넘었다. 올해 전공의 지원율은 30% 수준. 흔히 레지던트라 불리는 전공의는 4년제인데, 4개 연차에 전공의가 1명씩이라도 있는 흉부외과는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전남대병원, 부산대병원까지 전국에 5개 병원밖에 없다. 정의석 대한심장혈관흉부외과학회 기획위원장(강북삼성병원 흉부외과 교수)은 “20년째 ‘위기’라고 강조해왔는데 변한 게 없다”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정 위원장은 “지방에서 소아 심장 수술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어떻게 더 잘해야 정부에서 위기로 받아들일지 이제는 전혀 모르겠다”며 “오죽하면 흉부외과에선 사람이 너무 없으니 ‘나중에 후배들 몸값은 좀 오를 것’이라고 위로할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상황은 산부인과도 마찬가지다. 올해 전공의 지원율은 필요인력의 61%. 이것도 산부인과 전체의 얘기일 뿐, 출산과 관련된 산과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내과와 신경과 역시 겉보기에는 전공의 지원율이 100% 수준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속사정을 살펴보면 중증 질환 기피와 지방 기피 문제로 ‘속앓이’ 중이다.

김지홍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이사장(강남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은 “처음에 지원율이 조금 떨어졌을 때 ‘지켜보자’라는 시선들이 많았다. 이 정도로 급속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며 “소아과를 개원한 선배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소아과’ 간판 대신 의원 간판을 걸어야 그나마 살아남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소아과 지원하면 바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사진=뉴스1
◆“지방에선 소아 심장 수술 안 돼요.”

지원자 기피 과가 생긴 것은 한마디로 “힘들고 돈도 안 되고, 인정도 못 받는다”는 인식 때문이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강조하는 세태 속에서 경제적인 보상도 약한 중노동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특히 생명과 관련한 일을 다루는 만큼 소송 위험이 큰 것도 한몫했다.

기피과에 근무하는 한 교수는 “사명을 강조하던 시기는 이제 끝난 것 같다”며 “요즘 젊은이들은 잦은 호출과 야근으로 고생만 하고 돈도 안 되는, ‘고생길이 훤한’ 곳을 굳이 지원하지 않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전공의 지원율은 결국 전문의 배출, 장기적으로는 진료과의 ‘생존’과 연결된다. 20여년간 지속된 전공의 지원 부족에 1993년 57명이었던 한 해 흉부외과 전문의가 지난해 20명으로 3분의 1까지 내려갔다. 그 결과 1161명인 전국 흉부외과 전문의 중 707명, 즉 10명 중 6명이 50대 이상이다. 활동 전문의 37.5%에 달하는 436명이 10년 내 정년퇴직할 예정이라, 지금 추세대로라면 전문의는 1000명 미만까지 내려갈 전망이다. ‘고령화’를 넘어 ‘붕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소아 심장 분야는 현재 전문의가 25명 수준으로 ‘소멸’ 직전이다. 그나마도 전문의들이 서울에 몰려 있어 소아 심장에서 가장 흔한 심실중격 결손 수술조차 대부분 지역에서 불가능하다.

당장 1∼2년 차 전공의 지원자가 적어서 소수인 전공의에게 일이 많이 몰리면서 현장 ‘이탈’을 가속화하기도 한다. 과도한 업무에 ‘번아웃’이 온 전공의가 중도포기를 하는 사례도 속출하는 것이다. 소아청소년과에서 올해 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나선 것도 3년간 전공의 ‘제로’ 상태가 현실화하면서 학문의 ‘대’가 끊길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전공의 부족, 전문의 감소 ‘악순환’ … 교수님은 당직 중

필수의료 전공의 지원자 감소는 지역 간, 병원 간 격차 확대라는 ‘악순환의 굴레’로 이어진다. 한 내과 전문의는 “전공의가 부족하니 지원자들이 ‘무리 지어’ 한 곳으로 몰려가는 경향이 생긴다”며 “전공의가 ‘빵구’ 난 곳을 피해 2,3년차라도 상대적으로 많은 곳으로 ‘동반 지원’하는 형식이다. 이러다 보니 지방병원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소위 ‘빅5’ 병원 내에서도 비인기학과의 희비가 엇갈린다. 서울아산병원, 서울대병원은 꾸준히 지원자를 채우는 데 반해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는 올해 외과와 흉부외과 지원자가 1∼2명에 불과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병원 관계자는 “그렇게 전략적으로 동반지원하더라도, 어쨌든 기피과에 지원하는 것 자체가 잘 없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한숨 쉬었다.

일손이 부족하니 이젠 대학병원 교수도 ‘당직’을 서는 신세가 됐다. 흉부외과 같은 곳은 교수가 일주일에 두세 번씩도 당직을 서고, 소아청소년과는 서울은 한 달에 한 번꼴, 지방은 일주일에 한 번꼴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정부는 ‘수가 압박’, 병원은 ‘불효자 취급’

의료계는 생명과 관련한 ‘필수의료‘에 관련해 정부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이미 충분히 현실화했지만 정말 명맥이 완전히 끊긴 다음에는 회복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수술 위험도 대비 너무 낮은 수가가 책정되면서 병원에서도 필수의료를 ‘종합병원’ 이름만 유지하는 수준으로만 끌고 간다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수익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만성질환자가 입원하는 것이 남는 장사인 반면, 이런 ‘기피과’의 중증 질환 치료는 큰돈이 안 된다. 병원에서도 이런 과들을 수단으로 활용할 뿐 적극적인 개선에 나서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흉부외과와 신경외과가 대표적이다. 이런 과 수술은 시간과 생명을 다투는 만큼 6시간 이상의 고난도 수술을 하지만 보험 수가에 묶여서 ‘돈벌이’가 안 되는 게 현실이다. 가령 흉부외과 수술 중 빈도가 가장 많은 폐암의 폐엽 절제술은 5명의 의료진이 4시간을 소요하지만 수술료는 150만원에 불과하고, 수술시간만 10시간 걸리는 대동맥 박리증은 900만원 수준이다. 같은 10시간이면 1∼2시간짜리 다른 수술로 ‘회전율’을 높이는 게 병원 입장에서는 이득인 셈이다.

한 순환기내과 전문의는 “의사 내부에서는 다들 ‘우리 전공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러나 흉부외과에 대해서는 모두 ‘리스펙’한다. 흉부외과 수술 후에는 환자가 달고 나오는 ‘줄의 개수’부터 다르다”며 “CCTV 설치나 의료사고 등 의료계 불신을 부추기는 건 ‘선호과’들이다. 엄청난 술기(術技)를 가지고, 생명을 지키는 행위를 하는 ‘기피과’ 의료진에 대해서는 확실한 인정이 필요하다”고 의료계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정진수 기자 je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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