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뒤 역사] 문명 교류와 충돌의 십자로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해협

추왕훈 2022. 8. 20.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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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몽트뢰협약으로 튀르키예 관할, 교전국 군함 통과불허 원칙 확립
우크라 식량 수출선 해협통과는 좋은 조짐..정착여부는 지켜봐야

[※편집자 주 : '뉴스 뒤 역사'는 주요 국제뉴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 장소, 인물, 예술작품 등을 찾아 소개하는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우주에서 본 보스포루스해협 2020년 4월 20일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촬영한 이 사진의 가운데에 보스포루스해협이 보인다.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이 해협에서 가장 좁은 곳의 폭은 700m에 불과하다. 위쪽이 흑해, 아래쪽이 마르마라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유라시아대륙은 역사적으로 인구밀도가 희박하고 문명의 발전이 더뎠던 고위도에서는 한 덩어리지만 중위도 지역에서는 흑해와 에게해가 아시아와 유럽을 갈라놓고 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두 문명권의 동서간 접촉은 주로 바다를 통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바다가 가장 좁아지는 곳이 튀르키예(터키)의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이다. 한편, 남북으로 흑해와 지중해를 오가는 배 역시 두 해협과 그 사이에 호수처럼 놓인 마르마라해(海)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이렇다 보니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는 동서, 그리고 남북의 문명이 교류하는 통로이기도 했지만 갈등 시에는 반드시 지키거나 빼앗아야 하는 전략 요충지였다.

멀게는 2천500년 전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는 주력군 이송에 함선 이외에도 선박을 잇대 다르다넬스 해협 양편을 연결한 부교를 활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진위가 불분명한 고대 전쟁 때의 일화는 차치하고도 15세기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갈리폴리 전투에 이르기까지 두 해협은 역사의 줄기를 바꾼 다수의 큰 전쟁에서 격전의 현장이 됐다.

1천500년의 세월을 지켜본 아야 소피아 모스크 537년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서 성당으로 건립했으나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개조됐다. 튀르키예공화국 수립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되다 지난 2020년 모스크로 환원됐다.[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1453년 동로마제국을 정복하고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해협을 손에 넣은 오스만제국이 강력할 때는 두 해협에 다른 나라의 어떠한 군함도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오스만제국이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자 두 해협의 관할 문제는 유럽 열강의 역학관계에 따라 좌우됐다. 유럽 대륙을 대부분 제패한 나폴레옹은 오스만제국과 군사동맹을 맺어 지중해에서 영국의 해상 패권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영국은 1809년 오스만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두 해협에 관한 '고래(古來)의 원칙', 즉 외국 군함의 통행금지를 재확인하는 '다르다넬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러시아가 오스만제국 영토였던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대가로 두 해협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확보하려 했지만 영국을 비롯한 다른 유럽 주요국들이 반대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유럽 5대 열강은 1841년 '런던 해협 협약'을 통해 전시에 오스만과 그 동맹국 소속이 아닌 어떤 군함도 어떤 명목으로건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데 합의했다.

우주에서 본 다르다넬스해협 2010년 3월 19일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촬영한 이 사진의 위쪽에 갈리폴리반도, 그 아래쪽에 다르다넬스해협이 보인다. 가장 좁은 곳의 폭은 1천200m다. 오른쪽이 마르마라해, 왼쪽이 에게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영국과 러시아는 두 해협, 넓게는 오스만제국과 중·근동 지역을 둘러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1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같은 '연합국'(Allied Powers)이 됐고 오스만제국은 독일,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동맹국'(Central Powers)이 돼 이에 맞서는 처지가 됐다. 연합국은 당시 영국 해군부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 주도로 두 해협을 장악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으나 막대한 인명피해만을 낸 채 패퇴하고 말았다.

패전국이 된 오스만제국의 전후 처리 방안을 규정한 1920년 세브르 조약에 따라 두 해협은 국제 해역으로 선포되고 국제연맹의 관리를 받게 됐다. 하지만 그사이 오스만제국은 해체됐고 내전을 거쳐 탄생한 튀르키예공화국은 세브르 조약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튀르키예공화국의 지위와 남은 전후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 체결된 로잔 조약은 두 해협을 비무장지대로 만들고 모든 군함과 상선이 자유롭게 통행토록 하는 조건으로 튀르키예에 넘긴다는 조항을 담았다. 그러나 1935년 튀르키예가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에 따른 안보상 우려를 이유로 이 조항을 거부하고 두 해협 일대의 재무장에 나섰다. 승전국들은 다시 튀르키예와 전쟁을 벌일 것을 각오하지 않는 한 새로운 체제를 모색해야 했다.

갈리폴리 전투 투입된 ANZAC 부대 제1차 세계대전의 갈리폴리 전투에 투입된 ANZAC(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연합군단) 부대원들이 갈리폴리반도 해안에 정렬해 있다. 1915년 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서 영연방과 프랑스, 러시아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오스만제국의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해협을 장악하고자 했으나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군의 완강한 저항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낸 채 결국 철수했다. [게티이미지뱅크·재판매 및 DB 금지]

결국 1936년 6월 스위스 몽트뢰궁 호텔에서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열강과 튀르키예, 루마니아 등 흑해·에게해 연안국들이 참가한 가운데 시작된 회의에서 지금까지 시행되는 최종 합의안이 나왔다. 그해 11월 9일부터 발효한 '몽트뢰 협약'은 평화시 모든 민간 선박의 두 해협 통과를 보장했다. 튀르키예는 전시 또는 자국 안보가 위협받을 때는 모든 외국 군함의 통과를 막을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받았다. 튀르키예는 상선에 대해서도 교전국 소속이면 해협 통과를 불허할 수 있게 됐다.

협약은 군함의 수와 톤수, 적재 무기 등에 따라 해협 진입 방법과 체류 기간을 규정했으며 군함이 해협을 항해하려면 사전에 튀르키예에 통보하도록 의무화했다. 다만 흑해 연안국에 대해서는 주력함(capital ship)은 톤수와 관계없이 운항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제한을 대폭 완화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사실상 소련 군함이 흑해와 지중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보장한 이 협약이 마땅찮았으나 튀르키예가 마침 부상하던 파시스트 진영과 손잡게 될까 우려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몽트뢰궁 호텔 1936년 스위스 몽트뢰 마을의 호숫가에 지어진 이 호텔에서 주요 열강과 흑해·에게해 연안국들은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해협의 안전 운항 보장 방안을 논의했다. 그 결과 튀르키예공화국의 관할권을 인정하고 상선의 자유 운항, 교전국 군함의 운항 제한 등을 담은 '몽트뢰 협약'이 체결됐다. 이 협약은 지금도 골격을 유지한 채 시행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몽트뢰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또다시 위기에 직면했으나 튀르키예가 대부분의 전쟁 기간에 중립을 유지한 데다 양측 교전 당사자들 모두 최소한 대놓고 협약을 깨트리려 하지는 않았다. 소련이 그나마 흑해에 해군 기지를 두고 있었던 반면에 독일은 튀르키예가 두 해협 통과를 불허함에 따라 군함의 흑해 접근이 차단됐다. 독일은 철도와 운하 등 내륙 교통을 이용해 소형 함선을 들여오거나 군함 부품을 옮겨와 흑해 군항에서 조립했으나 물론 이런 방법으로 본격적인 해군력을 구축하기는 불가능했다.

2차 대전 이후 몽트뢰 체제를 위협한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두 해협을 공동 관리할 것을 튀르키예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튀르키예 인근 육지와 해상에 전력을 집결해 군사적 긴장을 조성했다. 미국이 개입 움직임을 보인 후 소련이 한발 물러섬으로써 이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중립 노선에서 벗어나 서방 진영으로 기운 튀르키예는 마침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하게 된다.

우주에서 바라본 흑해와 에게해 2011년 7월 22일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촬영한 이 사진 위쪽에 북해, 아래쪽에 에게해가 보인다. 가운데 호수처럼 보이는 것이 마르마라해다. 흑해에서 마르마라해로 이어지는 보스포루스해협은 너무 좁아 사진에서 식별이 어려울 정도다. 아래쪽 갈리폴리반도와 튀르키예 본토 사이 좁은 바다가 마르마라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해협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몽트뢰 협약은 당초의 골격을 유지한 채 지금도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 해협의 안전 운항을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두 해협의 운명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또다시 갈림길에 서게 됐다. 주요 곡물 수출국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수출 선박이 개전 이후 발이 묶이는 바람에 전 세계적인 곡물 위기가 초래됐으나 다행히 8월 들어 튀르키예의 주도로 열린 협상이 잘 진행돼 우크라이나의 곡물 운반선이 두 해협을 지나 지중해를 거쳐 전 세계로 항해할 수 있게 됐다.

튀르키예가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선의 안전한 해협 운항을 관할하고 무기 선적 여부를 조사해 해당 선박이 실제로 민간 선박인지를 감시할 수 있게 된 것은 몽트뢰 협약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또 이 협약에 근거해 교전국 선박의 해협 통과를 제한해 흑해에서 확전을 막는 데도 일정하게 기여하고 있다. 86년 전 체결된 몽트뢰 협약은 다시 한번 효용을 입증했으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보스포루스해협 통과하는 곡물 수출선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수출 곡물을 싣고 출항한 화물선 라조니호가 지난 8월 3일 보스포루스해협을 통과하고 있다. 튀르키예가 민간 선박의 이 해협 통과 시 안전을 보장하고 전시 외국 군함의 운항을 통제하는 것은 1936년 체결된 몽트뢰 협약에 근거를 두고 있다.[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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