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반지하는 죄가 없다

봉달호 2022. 8. 2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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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 1000에 월 20이었던가. 서울 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 가족이 택한 반지하 월세는 그랬다. 거기서 돌잡이 아이를 키웠고 둘째를 가졌다. 혹자는 무능한 가장이라 탓하겠지만 가난이 부끄럽다 여긴 적은 없다. 그 무렵 나는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고 주어진 조건 안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종로구 체부동에 있는 북한인권단체 사무실에 출퇴근하기 수월하면서, 손에 쥔 돈으로 고를 수 있는 최상의 선택지는 불광동 반지하 월세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침수 피해 현장을 방문, 현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오른쪽은 오세훈 서울시장. 이 반지하 주택에서는 발달장애 가족이 지난밤 폭우로 인한 침수로 고립돼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연합뉴스

지난번 폭우로 반지하에 살던 가족이 숨진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고 너도나도 여기저기 “한때 반지하에 살았소”라는 애틋한 고백이 이어진다. 물론 반지하에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운동가는 아니고, 사연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누구는 살림은 옹색했으나 삶은 따뜻했던 추억으로 말하는가 하면, 누구는 가업이 무너져 땅 밑까지 추락했던 설움, 곰팡내 나는 지긋지긋한 시멘트 바닥으로 기억할 것이고, 다른 누구는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던 날로 회고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나름의 이유를 갖고 많은 사람이 거기 살았다는 사실이고, 지금도 적잖은 사람이 거기 사는 현실 아닐까.

폭우가 지나가자 대책은 폭우처럼 쏟아졌다. 서울시는 ‘반지하를 없애겠다’는 웅장한 계획을 벼락같이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풍경에 회의감을 갖는 이유는, 우리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언제나 이랬고, 사건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소원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진부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8년이 지났건만 해양 사고는 오히려 늘었다는 통계는 우리가 사회적 이슈를 대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의 성격을 유난히 보여준다.

반지하 가족 사망은 불행한 일이다. 반지하를 아예 없애겠다는 대책도 ‘있을 수 있는’ 제안이다. 그렇다고 100년에 한 번 있을법한 폭우로 벌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없애겠다는 발상은 교통사고가 났으니 자동차를 없애겠다는 논리와 얼마나 다를까. 비록 일몰제로 장시간에 걸쳐 없앤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반지하가 어제오늘만 있던 것도 아니다. 그동안 그에 대한 진지한 논의 한번 없다가, 50년 존속하던 것을 없애겠다고 선포하는데 들인 시간은 대한민국에선 사나흘이면 족하다. 반지하라는 주거 형태가 생겨난 배경이 압축 성장을 추구하던 산업화 시대의 그늘에 있다면, 그것을 없애겠다는 결정 또한 지극히 ‘70년대’스럽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마저 제대로 못 하는 나라이니 잃기 전에 대책을 마련하라는 주문은 해를 달로 바꾸는 마법처럼 허망하게 들린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빨리’를 요구하고 싶지 않다. ‘제대로’를 바란다. 한정된 자원으로 어떤 일을 먼저 할 것인지 선후관계를 정하는 일이 정치이고 경제라면, 수도권에 있는 반지하라는 주거 형태를 전부 없애는데 소요되는 예산으로 진정 그 일을 하는 것이 맞는지, 다른 형태로 우회적 접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진지하게 따져볼 사안이다. 문제는 반지하가 생겨날 수밖에 없던 역사와 경제사회 구조에 있던 것이지, ‘누추한’ 반지하가 사라진다고 역사와 구조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스카 와일드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이런 문장이 있다. “착하게 살겠다는 결심은 항상 한발 늦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정책은 항상 두 걸음 늦었고,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을 찾아가는 의원님들의 마음은 항상 세 걸음 빨랐다. 우리가 겪는 불행은 그런 모든 빠름과 느름의 총합이었다. 반지하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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