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산중에서 토론을 한다면..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입력 2022. 8. 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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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불교의 스님들 하면, 대부분 고요한 산중에서 참선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아마도 선(禪)불교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불교 특유의 분위기가 한몫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일반적 상상과는 달리,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전통 강원(현 승가대학)에서는 그 풍경이 달라진다. 경전을 아침저녁으로 목청 높여 간경(看經)하는 것은 물론 논강(論講)을 하거나 대론(對論)을 벌이기도 한다. 선가에서는 ‘이언절려(離言絶慮)’라고 해서, 깨달음은 말이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전달하는 방편으로써 언어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유용성을 인정받는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이 있는 것이고, 강원의 학인 스님들은 선지식들의 말과 글을 이정표 삼아 구도의 발걸음을 내디딘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필자가 몸담은 가야산 해인사 승가대학의 경우, 매년 여름 석 달 동안 하안거에서 토론을 통해 경전의 교리를 습득하거나,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세상을 배워 나간다. 그 주제도 매년 다채롭다. ‘인공지능에도 불성(佛性)이 있는가’ ‘불교적 관점에서 존엄사는 허용될 수 있는가’ 혹은 ‘호국불교는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에 위배되지 않는가’ 등이다. 올해의 주제는 ‘메타버스 속 디지털 휴먼도 깨달을 수 있는가’ 그리고 ‘한국불교의 승복은 현대사회의 정서에 부합하는가’ 두 가지였다. 갓 출가한 2년 미만의 스님들부터 고학년 스님들까지 추첨을 통해 짝을 이뤄 팀을 만든다. 의도치 않게, 10대의 나이 어린 스님이 40대 스님과 짝을 이뤄 마치 세속의 아들과 아버지가 한 팀이 된 듯한 모습이 나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다양하고 개성 있는 팀들이 만들어지고 제각각 주어진 주제를 같이 공부하며 전략을 구상한다. 하안거가 시작되면 매주 상대 팀을 달리해 토론을 벌이게 된다. 석 달 동안 무더위 속에서 총 4라운드의 토론을 벌이고, 안거 마지막 날이 되면 상위 네 팀이 결선을 치르며 회향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회향(廻向)’이란, 자신이 지은 선행의 공덕을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향해 돌려주어 그 에너지를 나누고 모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방편이다. 산중의 어른 스님들을 모시고 심사를 부탁드리면, 어느새 그럴듯한 토론대회가 꾸려진다.

이 해인사의 산중 토론은 원래 갓 출가한 어린 학인 스님들이 어려운 교리를 쉽게 배워 나가는 방법의 하나로 고안되었다. 상당수 불교 경전에 대해 한글 역경 사업이 진행되어 왔지만, 여전히 옛말투의 불교 용어로 인해 어린 학인들이 현대적 언어감각과 불교 용어 사이에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더해 초심 학인 스님들은 한문이라는 장벽 너머로 불교를 이해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다. 교육 현장에서 전통 한문 교육도 병행되고 있지만, 우리 말과 글로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토론해봄으로써 그 틈을 좁혀 가려는 시도라고 할 것이다. 산중 토론의 이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말로만 중생을 구제하면서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대승불교가 아니라, 실제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문제로 갈등하고 고통을 겪는지에 대해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공부의 장이 된다.

이 토론 수업의 백미는 어느 한쪽 주장만을 계속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추첨에 의해 언제든지 찬성과 반대 입장을 번갈아 대변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이전 토론 경기에서 ‘메타버스 속 디지털 휴먼도 깨달을 수 있다’는 찬성 쪽이었다가, 다음 경기에서는 ‘깨달을 수 없다’는 반대편에서 대론을 벌여야 한다. 학인 스님들은 양극단의 입장을 모두 학습하고 토론을 펼쳐야 하므로 해당 주제에 대한 이해가 깊고 넓어지는 것은 물론, 자신이 반대하는 쪽의 주장을 직접 제기해봄으로써 정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중도(中道)’가 무엇인지 일상에서 드러내고, 피부로 느끼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세상이 발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기후변화, 전염병, 전쟁, 빈부격차, 사회적 양극화에 고통받고 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정치인들은 말과 글로 사회적 대립을 조율한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관점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고, 자신들의 목청만 높이고 있다. 어쩌면 문제의 정답과 해결책은 어느 한쪽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아무리 정교한 논리와 자료로 무장하고 상대방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상대편의 관점이 되어보려는 최소한의 시도마저 없다면 그 어디서도 돌파구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상대방의 시선과 관점에서 갈등을 보려는 단 한 번의 시도만으로도 이미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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