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파일] 21세기 산유국과 패권
미국이 이렇게 막대한 돈을 들여 바닷길을 지배하려 한 것은 석유가 곧 패권이었기 때문이다. “석유를 지배하는 자는 한 대륙을 지배하고, 통화를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의 말대로, 한편으론 통화 패권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페트로 달러 체제(미국 달러로만 석유 대금 결제)를 통해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를 공고히 한 것이다. 미국이 세계 금융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력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달러 패권의 배경엔 석유가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돼 기축통화인 달러 결제가 막힌 러시아로부터 몰래 석유를 들여오고 있다는 소식도 나왔다. 중국은 2015년 국제 위안화 결제 시스템(CIPS)을 만든 이래 꾸준히 달러 패권에 도전한 바 있다. 미국이 회계감독권을 이유로 지난 5월 중국 국유 석유회사 시노펙과 페트로차이나 등을 뉴욕증시 상장폐지 명단에 올린 이유다. 아직 도전자인 중국 입장에선 민감한 자금 흐름을 공개할 수 없는 노릇이라 이들 기업을 자진 상장폐지시키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는 결정이다.
‘21세기 석유’인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중국의 약진이 위협적인 수준에 올라서자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키며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도 전쟁 위기감을 키워 대만을 확실히 붙잡아 놓으려는 의도란 해석이 나올 정도다.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반도체 산유국’ 대만으로부터 피아 구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한국 역시 피아식별의 순간이 그리 머지않을 것이다.
올해 벌어진 미국의 행보가 중국 견제에 집중됐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인데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인 한국 정부의 행보가 보이지 않는다. 첨단산업 지원을 논의해야 할 국회는 정쟁 속에 멈춰섰다. “이대로 가다간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문가들의 지적이 더욱 뼈아픈 상황이다. 전 대통령의 자택을 압수수색할 정도로 대립하면서도, 국익을 챙길 땐 단결하는 미국 정치권이 부러울 따름이다.
황건강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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