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잃은 소녀에게 그의 친구 '없어'가 건네는 말.."없어도 할 수 있어"[그림책]

나와 없어
키티 크라우더 글·그림, 이주희 옮김
논장 | 32쪽 | 1만4000원
“여기, 있는 건 없어.” 첫 문장부터 오묘하고 모호하다. 유와 무에 대한 철학적·언어적 유희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없어’라는 이름의 가상 친구를 소개하는 상황이다. 어린 소녀 라일라는 몸을 감싸다시피 커다란 아빠의 웃옷을 입고 장화를 즐겨 신는다. 라일라에겐 ‘없어’가 유일한 친구인 듯하다. 외출할 때는 다른 아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없어’와 어깨동무를 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면 ‘없어’를 위해 아무것도 담지 않은 접시를 내놓는다. 그런 라일라를 보는 아빠는 걱정이 많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라일라가 ‘없어’와 친구가 된 것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인 것 같다. 생전 히말라야푸른양귀비를 좋아했고 히말라야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엄마가 떠난 뒤, 라일라는 ‘없어’에게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라일라는 정원사인 아빠가 신기한 꽃씨를 틔우곤 하던 큰 헛간에 ‘없어’를 데려가기도 한다. 세상의 시선이 이상해도 상관이 없었다.
다행히도 ‘없어’는 라일라의 말만 수동적으로 듣는 친구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라는 라일라의 말에 ‘없어’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고 반박한다. ‘없어’는 라일라에게 씨앗을 심으라고 제안한다. 처음엔 화를 내던 라일라는 ‘없어’가 사라진 뒤에야 씨앗을 심고 정성껏 돌본다. 초가을에 심은 씨앗은 겨울을 나고 봄이 문턱에 오자 땅을 뚫고 나온다. 사라졌던 ‘없어’도 다시 나타난다.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 애도, 회복의 과정을 겪는 어린이를 그린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고 없지만, 그 ‘없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조력자가 필요하다. 라일라의 눈에만 보인 ‘없어’는 어쩌면 내면에 잠재한 ‘삶의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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