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영웅"..단양 '시루섬의 기적' 50주년 기념식
(단양=연합뉴스) 권정상 기자 = "당신들은 영웅입니다."
19일 밤 어둠이 깔린 충북 단양군 남한강 변에 1972년 당시 시루섬에 거주하던 37가구의 세대주 이름이 하나하나 울려 퍼졌다.
그해 8월 단양을 덮친 대홍수 때 협동심과 희생정신으로 죽음의 위기를 극복한 시루섬 주민 240여명에게 영웅 호칭을 헌정하며, 대표로 이몽수(82)·지현탁(작고) 전 이장 등 37명을 일일이 호명했다.
이 행사를 주관한 향토 작가 문상오 씨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공포 앞에서 주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했다"며 "이는 세계 재난사에 영원히 기록될 역사의 승리이자 기적으로, 이를 몸소 이뤄낸 시루섬 주민이 영웅이 아니면 세상 누구를 영웅이라 하겠는가"라고 했다.
단양군이 이날 '시루섬의 기적' 50주년을 맞아 시루섬이 내려다보이는 단양역광장에서 연 기념행사는 시루섬 생존자들이 반백년 만에 눈물로 해후하는 자리였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시루섬 생존자 60명을 비롯해 김영환 충북도지사, 군의회 의원, 주민 등 250여명이 참석했다.
김문근 단양군수는 "50년 전 오늘 시루섬 마을이 홍수로 없어진 뒤 서울, 용인, 청주로 흩어진 주민들이 이따금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을지는 몰라도 만남의 기회는 없었다"며 "이번 만남을 통해 시루섬 주민들이 옛정을 나누고 이들의 영웅담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서양에 타이태닉 정신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시루섬의 정신이 있다"며 "시루섬 주민의 헌신과 협동심을 단양의 정신으로 계승 발전시키겠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생존자들은 50년 전 오늘 극한 상황을 딛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만큼 한꺼번에 다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가 담긴 합동 생일잔치상을 받았다.
생일상에 오른 뽕잎 주먹밥은 당시 구사일생한 주민들의 첫 끼니로, 물이 빠진 뒤 폐허 속에서 찾아낸 쌀과 가마솥, 그리고 변소 자리에 고인 황토물로 밥을 짓고 고추장으로 간을 해 뽕잎에 싸 나눠 먹었다고 한다.
당시 시루섬 상황을 재연한 낭독 공연과 생존자의 영상 증언, 물탱크 생존 실험 영상 상영 등도 이어졌다.
물탱크 위에 피신해 있다가 백일 갓 지난 아기를 잃은 최옥희(83) 할머니는 "빽빽한 사람들 틈 사이에서 끼어 있다가 잠시 공간이 생겨 앉았더니 사람들이 떼밀려 내 등을 덮쳤다"며 "그 순간 아기 신음이 들려 나중에 옆에 있는 아줌마에게 아기를 봐달라고 했더니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하더라"라고 회고했다.
최 할머니는 이어 "아기는 어차피 살아 돌아올 수 없고, 산 사람이나 살아야지 하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고 무덤덤하게 증언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생존자들은 유람선을 이용해 시루섬을 직접 둘러보고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재를 지내기도 했다.
또 마을자랑비 이전 제막식과 시루섬을 주제로 한 시화전과 사진전, 희망의 횃불 점화 등의 프로그램도 진행됐다.
시루 형태를 띤 시루섬은 행정구역상 단양군 단양읍 증도리에 속했던 23만8천㎡ 면적의 남한강 섬으로,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지금은 면적이 6만㎡로 쪼그라들었다.
1972년 8월 19일 태풍 '베티'가 몰고 온 폭우로 강이 범람하기 전까지는 비교적 번잡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급격히 불어난 물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주민 198명은 높이 6m, 지름 5m 크기의 물탱크에 올라가 서로 팔짱을 끼고 14시간을 버텨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름도 짓지 못한 최 할머니의 백일 남아가 유일한 희생자였다.
또 34명은 물탱크 옆 소나무 위로 대피했으나 급조한 발판이 무너지면서 7명이 물에 휩쓸려 사망했다.
다른 주민 10명은 철선에 올라타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양군은 2017년 조성한 시루섬의 기적 소공원에 '14시간의 사투 그리고 인고의 어머니'라는 제목의 글로 최 할머니와 시루섬 주민들의 사연을 기록했다.
jus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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