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된 인격, 자궁 속 뇌..그렉 이건 SF 속 '부서진 인간들'
그렉 이건 지음·김상훈 옮김 | 허블 | 532쪽 | 1만8500원
번역 출간이 뉴스가 될 때가 있다. 그렉 이건의 한국판 특별 선집 <내가 행복한 이유> 출간도 SF팬들에겐 뉴스다. 뉴스거리가 될 만한 이름값이나 휴고상, 로커스상, 아시모프상 등을 수상한 이력에 비추면 번역된 이건의 책이 많지 않다.
출간 확정을 두고 테드 창이 건넨 메시지는 “그렉, 아직까지 네 작품이 한국에선 거의 번역되지 않았다니 정말 놀라워!”였다고 출판사 보도자료는 전한다. 두 사람은 ‘하드 SF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창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여러 차례 이건을 꼽았다.
첫 번역 출간 작품은 2003년 나온 <쿼런틴>(행복한책읽기)이다. 이 책도 SF 전문 번역가이자 비평가인 김상훈이 번역했다. 11편의 중단편을 모은 이번 선집 표제작인 ‘내가 행복한 이유’는 김상훈이 2008년 옮긴 <하드 SF 르네상스 2>(행복한책읽기)에 들어갔다. 52명의 글을 모은 <무신예찬>(현암사, 부제는 ‘신 없이 살아가는 50가지의 방식)엔 이건의 ‘잠시, 거듭나다’를 실었다.
“양심 및 자연과학이 밝혀내는 모든 것과 완벽하게 양립”하던 자기 신앙 상태가 와해하는 과정을 적은 이 글에서 이건은 자신이 한때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공유했으리라 짐작되는 것으로 “우주의 목적이 있다는 믿음, 우리 역사의 형언할 길 없는 참상과 일상생활에서 겪는 사소한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결국은 바로잡힐 것이라는 약속”을 꼽았다. 이런 ‘믿음’과 ‘약속’에 매달려 극단적인 행위로 치닫는 가상 인물을 그려낸 게 선집 중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다.
생화학자 존 쇼크러스는 에이즈를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에게 내리는 천벌”이자 “악인들은 죽은 뒤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때도 천벌을 받을 수 있다는 증명”으로 여기는 인물이다. “간통자들이여 남색 꾼들이여 회개하고 구원받으라! 지금 당장 그런 추잡한 행위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지옥 불 속에서 영원히 타게 될 것이다!”라는 광고를 신문에 내곤 했다. “콘돔 따위를 신뢰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데도, 감염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 날 구약의 아무 곳이나 펼쳐 든 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었다. 그는 “숙주의 성별을 식별하는 유전자 표지가 동성 간 성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할 때 대량 출혈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만든다. 신의 역사(役事)를 실행하는 일로, “이번에는 그 어떤 죄인도 천벌을 피할 수 없어”라고 믿었다.
선집 중 ‘실버파이어’는 ‘정보 시대 이후 인류를 직격한 최초의 팬데믹’과 신앙 문제를 다룬다. 이건은 주인공 입을 빌려 “(기독교 근본주의) 양분이 되어주던 사람들의 무지와 편협함은, 밀물처럼 몰려드는 엄청난 양의 정보 앞에서는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제대로 거행하지 않은 마법 의식이 무엇이고, 자기가 어떤 제물을 바치지 않아서 이렇게 됐는지”를 알려주길 바라는 감염자에게 독백처럼 건넨 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도덕극이 아냐. 병은 병에 불과하고, 그것에 숨겨진 의미 따위는 없단다. 우리는 신의 분노를 달래는 데 실패한 것도 아니고 … 우리 모두가 어떤 수준에서는 여전히 가장 힘들게 터득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인간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김상훈은 소재적인 측면에서 이건의 주된 작품 경향을 ①유전공학과 뇌과학과 컴퓨터과학의 최신 성과에 기반한 실존주의적/인문학적 SF ②우주의 기본 구조를 낱낱이 탐구하는 수학 SF ③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을 종횡무진으로 구사해서 블랙홀이나 멀티버스 등의 자연현상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물리학 SF ④먼 미래에 인간의 심신을 완전히 소프트웨어화한 ‘카피(copy)’의 형태로 불사를 획득한 인류의 상상을 초월한 여정을 다룬 미래 SF 등으로 분류한다. 이번 선집엔 ①에 해당하는 경향의 작품을 주로 실었다.
‘적절한 사랑’이 그중 하나다. 아내는 열차 사고를 당한 남편의 뇌를 자궁에 보관한다. 이후 대리모 몸에서 뇌 기능 발달이 억제된 채 생명 유지 기능만 키운 클론에 이식한다. 그는 “대리모를 고용해서 뇌 손상을 입은 ‘아이’를 낳게 하는 행위”는 올바른지, “아기 모양의 물체를 잉태하는 행위와, 혼수상태에 빠진 연인의 뇌를 잉태하는 행위” 중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지 등을 두고 고뇌한다. “짜부라진 사지나, 박살 난 뼈나, 손상으로 인해 출혈이 멎지 않는 내장”이 아닌 ‘뇌’가 과연 남편인지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 고뇌는 비용 지급이 멈추면 남편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병원 문제까지 걸쳐 있다. 변호사는 보험 규정과 병원 선택에 관한 법률 문제를 두고 “현 정부는 그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하는 최선의 방법은 시장 원리라고 보고 있다”고 답한다.
망자 4000명의 데이터 네트워크로 이뤄진 의뇌를 소재로 쓴 ‘내가 행복한 이유’는 인간 정체성 문제를 분석한다. ‘내가 되는 법 배우기’도 인간 의식을 광학 결정체에서 ‘실행’하는 ‘소프트웨어’가 ‘나’인지를 파고든다. 컴퓨터 파일을 삭제하듯 옛 인격을 지우고 다양한 인격과 재능을 새로 코딩하는 문제를 ‘바람에 날리는 겨’에서 다룬다.
이건의 작품에 드러난 과학 세계는 암울하고, 인간들은 불안하다. 작가의 과학관이 어두운 건 아니다.
이건은 “인간이 물리적 우주의 일부이며, 이성과 관찰을 통해 그 우주를 통괄하는 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심오하며 중요한 통찰이었지만, SF의 상당 부분을 위시한 대부분의 문학은 그 사실을 아예 무시하거나 경시해왔다”면서 “(진정한 현실 참여 문학은) 우리가 우주에 관해 그토록 많은 것들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그 세부 사항에 환희하는 법”(‘옮긴이의 말’ 중)이라고 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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