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담대하기만 했던 구상? 북한도, 미국도..

남승모 기자 입력 2022. 8. 1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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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만 보여주면 거기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도와주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종전과는 다른 이야기이고…"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밝힌 대북 제안, 이른바 담대한 구상입니다. 정부는 특히 북미관계 정상화와 재래식 무기체계 군축 논의 등 정치·군사적 상응조치도 포함하고 있다며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제시했던 '비핵·개방·3000'과는 다르다고 강조했습니다.
 

"상대해주지 않을 것"…북, 판단 기준은 '자기 필요'

하지만 8.15 경축사에서 담대한 구상의 세부 내용이 공개된 지 나흘 만에 나온 북한의 대답은 정부 기대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도와준다'는 말이 귀에 거슬렸던 걸까요? '반응'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그냥 '비난'에 가까웠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부부장은 담화를 통해 "(남측이) 앞으로 또 무슨 요란한 구상을 해 가지고 문을 두드리겠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까지 나서 그렇게 전과는 다르다고 했건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 10여 년 전 이명박 역도가 내들었다가 세인의 주목은커녕 동족 대결의 산물로 버림받은 '비핵·개방·3000'의 복사판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습니다. 또 "'북이 비핵화 조치를 취한다면'이라는 가정부터가 잘못된 전제"라면서 "세상에는 흥정할 것이 따로 있는 법, 우리의 국체인 핵을 경제협력과 같은 물건 짝과 바꾸어 보겠다는 발상이 윤석열의 푸르청청한 꿈이고 희망이고 구상"이라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핵을 포기할 생각도, 남한과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분명히 밝힌 겁니다.

북한의 이런 반응은 확대할 것도 축소할 것도 없이 '지금은 대화할 생각이 없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보수 정권이었던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남북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고, 반면 대화에 적극적이었던 문재인 정부 때도 초기에는 도발로 일관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자기 필요에 따라 남한과 대화할 필요가 있을 때 나섰을 뿐 우리 쪽 입장이나 제안은 큰 변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미 국무부 "비핵화 달성 위해 실질적 조처 할 수 있다"…그래서 무엇을?

그렇다면 북핵 문제 해결의 또 다른 축인 미국은 어떨까요? 미 국무부는 윤 대통령이 밝힌 담대한 구상에 대해 지지한다는 뜻을 거듭 밝혔습니다. 다만 대북 제재 문제를 놓고 미묘한 시각 차가 있었는데 오늘 (현지시간 18일 브리핑)에서 이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국 정부는 대화 초기부터 북한과의 자원 교환 프로그램 등 대북 제재 면제를 모색하고 있는데 가능하다고 보는가'…

우리나라의 이런 정책 추진은 자칫 전날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이 밝힌 '북한의 근본적 태도 변호 전 대북 제재 완화는 없다'는 입장과는 배치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프라이스 대변인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공동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조처를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윤 대통령이 지원의 전제로 언급했던 '북한의 비핵화 의지 표명'이 대북 제재 완화의 조건을 제시됐던 '북한의 근본적인 변화'가 될 수 있느냐'는 추가 질문에는 "그런 단계를 본 적이 없기에 가정적인 조치에 대해선 평가하고 싶지 않다"고 피해갔습니다.

또 정부가 추진 중인 '한반도 자원식량교환프로그램' (북한이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때 우선 요구한 광물자원 수출길을 열어주기 위해 북한 광물과 식량을 교환하는 방안)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보자면, 우리의 제재 체제와 국제 제재 체제는 식량을 포함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재에서) 면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인도주의적 지원으로 판단될 경우 제재 면제도 가능하다는 취지로 해석됐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적어도 담대한 구상에 대한 한미 간 견해 차는 크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질의 응답을 했던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프라이스 대변인의 발언은 다분히 원론적 차원의 언급일 뿐 우리 정부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 달성을 위해 실질적 조치를 할 수 있다", "(어느 지역 제재이든) 인도주의적 지원은 제재에서 면제된다"... 이런 발언들은 우리 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라기 보다는 미국이 평소 밝혀온 원칙을 재확인한 걸로 보는 게 맞을 듯 합니다.

미 국무부 브리핑은 보통 1시간 이상 진행됩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여기서 질의 응답의 순서는 현재 미국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AP 기자가 던진 이스라엘 관련 질문을 시작으로 이란, 러시아-우크라이나, 터키, 시리아, 중국-타이완 등 사실상 거의 이슈가 다 언급된 뒤에야 북한과 한국 관련 내용이 나왔습니다. 북핵, 한국 관련 발언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중간에 한국계 기자의 관련 질의로 북한이 동북아의 가장 큰 위협 요소로 거론되긴 했지만 이 역시나 길게 다뤄지진 않았습니다.)

 

현안에 끼지 못한 '담대한 구상'

긴 브리핑이 끝난 뒤 담소 형식으로 진행된 백 브리핑에서 프라이스 대변인에게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한반도 자원식량교환프로그램'(R-FEP)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잘 모르지만 알아보겠다며 나름 성의를 보였습니다. 대변인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순 없습니다. 국무부 내에 대북 담당 부서가 있고 해당 부서가 우리 부처와 논의를 진행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담대한 구상'과 그 구체적 내용이 대변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어야 할 정도의 현안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북한은 우리와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미국도 우리 노력을 평가한다는 입장이지만 조율까지는 한참 멀어 보입니다. 그럼 미국이라도 나서야 하는데 미국은 자신들이 내놓은 조건 없는 대화에 북한이 응답하는 게 먼저라는 입장입니다. 바꿔 말해, 대화는 환영하지만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미국이 먼저 움직일 생각은 없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북핵 문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또 한 번 실감한 하루였습니다.

남승모 기자smna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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