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 믿음에 대하여

박소연 2022. 8. 19. 10: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시아경제 박소연 기자] K방역 초기 시스템은 너무 잔인했다. 분, 초 단위의 생활 동선 공개는 방역이라는 측면에선 일정 부분 효과를 발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삶을 치명적으로 파괴했다. 개인의 사생활과 정체성이 공개됐고 소수자에 대한 혐오, 개인에 대한 근거 없는 루머 등도 양산됐다.

처음 접하는 질병, 잘 모르는 감염병으로부터 나와 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은 타인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방관하게 했다. 정부 정책과 법에 따른 통신사들의 정보 제공, 이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우리들. 감염병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지만 동선 공개는 사라진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다. 낯선 감염병 앞에서 우리는 타자(他者)에게 지독하게 잔인했다.

소설가 박상영의 신작 소설 ‘믿음에 대하여’는 2020년 이태원발 코로나 집단감염 사태를 모티프로 한다.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손꼽히는 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로 선정돼 화제를 일으킨 전작 ‘대도시의 사랑법’, ‘1차원이 되고 싶어’를 잇는 ‘사랑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수록작은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유례없이 세상을 휩쓸었던 2021년과 2022년에 쓰여졌다. 팬데믹 속 사회적 거리두기와 그로 인한 고립감, 그 안에서 더욱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소수자들의 고통이 소설 속에 절절하게 담겨있다.

책 한 권에서 네 편의 중단편이 연결되면서 이어지는데 각 작품이 시작되는 페이지에 주인공의 이름이 붙어있다. ‘요즘 애들’의 김남준, ‘보름 이후의 사랑’의 고찬호, ‘우리가 되는 순간’의 유한영과 황은채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의 임철우가 그들이다. 이들은 서로 직장동료, 지인, 애인 등의 관계로 모두 연결된다. 이 소설을 보는 재미 중 하나다. 앞글에선 조연이었던 등장인물이 뒷글에선 주연으로 등장해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요즘애들’에서 스물여섯에 잡지사 인턴으로 일을 시작한 남준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사수 배서정에게 틈만 나면 호되게 혼이 난다. 우리 모두가 뭣 모르고 한 번쯤은 당해봤고, 또 생각 없이 저지른 무심하고 냉혹한 시절의 실수다.

‘보름 이후의 사랑’에서 수능을 치자마자 온라인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사람을 만나고 클럽을 전전하는 이십대를 보낸 찬호는 생김새도 성향도 직업 특성도 판이한 남준과 인생 처음으로 장기 연애를 하게 된다. 규범과 불화하는 섹슈얼리티를 가진 이들이 한 명의 사회 조직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또 온전한 동거 생활을 하기 위해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하게 하는 내용이다.

소수자에 더 잔인한 팬데믹
낙인찍히고 배척당하지 않기를

‘우리가 되는 순간’에서 신생팀으로 전출된 한영은 새로 온 팀장 은채와 팀을 꾸려나가고 유튜브 콘텐츠들을 성공시키며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은채와 한영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사내정치에 휘말려 사이가 애매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동료로서, 친구로서 서로에게 믿음을 주는 인간적 순간이 그려진다.

‘믿음에 대하여’에서는 사진작가를 그만두고 이태원에서 이자카야를 운영하는 철우의 이야기가 큰 줄기가 된다. 오랜 꿈을 이루고 한영을 만나 함께 살면서 활기를 찾는 철우. 하지만 짧은 행복을 뒤로하고 세계를 휩쓴 감염병으로 인해 가게는 폐업 위기에 처하고 이모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한영마저 밖으로 나돌면서 철우는 다시 흔들린다. 진실한 마음과 믿음이 있는 관계를 향한 바람,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노력이 언제라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삶의 무정함을 생각하게 된다.

박상영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일상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낙인찍히고 배척당하는 일이 없기를 염원한다고 썼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회사원과 작가라는 두 개의 직함을 가지고 회사에 출근했다는 작가는 퇴근길 만원 버스를 타면 뒤축이 닳아버린 검은 구두와 엉덩이 부분이 반질반질해진 바지 같은 것들이 유달리 눈에 밟혔다고 한다. 작가는 책의 곳곳에 회사원 시절, 자신의 마음의 온도를 새겼다고 한다. 사회의 병폐를 직시하는 시선이 날카롭지만 따뜻하다.

믿음에 대하여|박상영 지음|문학동네|290쪽|1만4500원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