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개나 소에게 배우는 늙음의 쓸모

2022. 8. 19.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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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혼자 쓰지만 집필실 마당은 함께 누린다.

아침마다 40분을 걸어 집필실 마당으로 들어서면 동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설가를 맞이한다.

그곳 개들이 맹렬하게 짖어대는 바람에 아직 소들과 인사를 정식으로 나누진 못했다.

늙은 소 돌리나 늙은 개 복실이의 품격을 존중하기 위해선, 동물들의 늙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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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이어 배우고 가르치는 소들
때론 의지하고 독립하며 살아
6월 세상 뜬 진돗개 복실이도
개·고양이 타이르며 마당 지켜
이런 경험·지혜 후대에 이어져
동물의 늙음 무시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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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혼자 쓰지만 집필실 마당은 함께 누린다. 모이를 따로 주지 않는 까치와 참새를 제외하더라도 이곳을 쓰는 동물로는 개와 고양이와 닭과 공작이 있다.

아침마다 40분을 걸어 집필실 마당으로 들어서면 동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설가를 맞이한다. 고양이는 저만치 숨고, 닭과 공작은 고개를 숙이고, 오직 개들만이 꼬리를 친다. 일년 넘게 섬진강 들녘에서 차례차례 산책을 시킨 결과다. 장선마을로 산책을 가려면 소를 기르는 축사를 먼저 지나쳐야 한다. 그곳 개들이 맹렬하게 짖어대는 바람에 아직 소들과 인사를 정식으로 나누진 못했다.

로저먼드 영이 쓴 <소의 비밀스러운 삶>을 읽다가 6월에 세상을 뜬 진돗개 복실이를 떠올렸다. 로저먼드 영이 영국 코츠월드 비탈진 언덕에 마련한 ‘솔개 둥지 농장’ 특징은 소들을 나이나 무게나 품종에 따라 나누지 않는다는 점이다. 풀을 먹을 자리와 벗을 택할 권리를 소들에게 넘겼더니 다양한 이합집산이 일어났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늙은 소들의 경험과 지혜가 젊은 소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에서 늙고 약하고 병든 소는 쓸모없는 도축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솔개 둥지 농장’의 소들은 대를 이어 배우고 가르치면서 때론 의지하고 때론 독립한다. 젊은 암소 돌리 2세는 송아지를 사산한 후 자신을 낳고 길렀던 늙은 암소 돌리를 찾아간다. 돌리는 돌리 2세의 온몸을 핥으며 위로한다. 엿새를 엄마 곁에 머문 돌리 2세는 기운을 차린 후 제자리로 돌아온다.

집필실 마당의 개들은 개성이 뚜렷하다. 밥순이는 엄청나게 빨리 달리지만 사람을 좋아해서 멀리 달아나진 않고, 밥돌이는 당당하고 멋진 갈색 털을 지녔는데도 사람을 무서워해서 꽁무니 걸음을 한다. 봉구는 언제나 의젓하게 기다리는 편이고, 몽실이는 꼬리로 풍차를 돌리며 급한 마음을 드러낸다. 말썽꾸러기는 몽실이다. 줄만 풀리면 닭이며 토끼며 참새에게 달려들어 물고 뜯는다.

개들을 타이르고, 어린 고양이 도담이와 큰품이가 장난을 쳐도 화내지 않으며, 닭과 공작을 지켜온 개가 바로 복실이다. 열여섯살이 된 지난해부터는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침침하고 털갈이도 깔끔하지 못했다. 비틀비틀 느릿느릿 걸었고, 볕 좋은 담 아래 엎드려 자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나 복실이가 있는 것만으로도 집필실 앞마당은 평온했다. 개들끼리 혹은 개와 고양이가 싸우려 들거나 떠돌이 개들이 닭장 근처를 어슬렁거릴 때면, 복실이가 먼저 알고 가선 막아섰다.

늙은 소 돌리나 늙은 개 복실이의 품격을 존중하기 위해선, 동물들의 늙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늙으면 신체 기능이 감소하고 병들기 마련이지만,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머물 장소와 감당할 일과 즐길 놀이를 빼앗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복실이가 세상을 떠난 후 자리 이동이 있었다. 복실이는 집필실 앞 소나무 아래에 묻혔다. 복실이가 노년을 보낸 뒷마당 집으론 출산한 밥순이가 강아지들과 함께 들어갔다. 복실이가 천천히 걷던 마당을 강아지들이 몰려다니며 이리 뛰고 저리 뒹군다. 복실이의 경험과 지혜가 밥순이를 거쳐 저 어린 강아지들에게 전해질까.

그러거나 말거나 몽실이는 산책을 나가자며 또 꼬리 풍차를 돌린다. 봉구부터 한바퀴 돌고 와선 몽실이와 함께 섬진강으로 향한다. 축사 가까이 다가가자 개들이 오늘도 짖는다. 그런데 여태껏 잠잠하던 소 몇마리가 제법 크게 운다. 짖음과 울음 사이로 서유석의 노래 한구절이 흘러나온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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