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16) 한량 이원수

2022. 8. 19.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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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헌 처가 가는 이원수
주모 유혹 한사코 밀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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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강릉은 태백산맥 너머 동해에 접해 있지만 논밭이 드넓고 기름진 데다 기후가 따뜻해서 예부터 천석꾼 부자가 수두룩했다. 평산 신씨 신명화는 강릉 토호로 노비를 무려 170여명이나 거느린 거부였다. 드넓은 집 안에 검은 대나무를 담 밑에 심어 사람들은 그 집을 오죽헌(烏竹軒)이라 불렀다.

그에겐 슬하에 딸이 다섯 있었다. 둘째딸 신인선은 다섯살에 글을 깨치고 일곱살에 시작한 그림은 열살이 되자 화가 반열에 올랐다. 신인선이 혼기가 찼을 때 아버지 신명화는 한가지 걱정이 떠올랐다. 시집살이를 하게 되면 딸의 재능이 빛을 잃고 사그라져버릴까 고심하게 된 것이다. 신명화는 결국 경기 파주의 덕수 이씨네의 이원수, 자신의 집안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집안의 아들인 데다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한 만만한 사람을 데릴사위로 들였다.

당시 사회 풍조가 신랑이 신부집으로 장가와 처가살이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신인선은 만석꾼 부잣집 친정에서 신랑 눈치 보지 않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신인선은 스스로 호를 ‘사임당(師任堂)’이라 지었다.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사표(師表)로 삼겠다는 뜻이다.

어느 날 이원수는 파주 본가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한답시고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골똘히 부인 생각을 하다가 책을 덮고 단봇짐을 챙겨 강릉으로 향했다. 처가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그가 어느 주막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갈 때 주모가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했다. 개다리소반에 술상을 차려 와 종일 걸어 잠이 쏟아지는 이원수에게 술을 권하고 연방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며 희멀건 허벅지를 드러냈다. 이원수는 과거를 보러 가다가도 풍악이 울리면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한량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처가에 가면 신부에게 온 힘을 쏟아야 할 판인데 모아둔 힘을 주모에게 쏟아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는 이를 악물고 주모의 유혹을 뿌리쳤다.

이원수는 강릉 오죽헌 처가에서 달포를 머물다가 다시 파주로 가는 길에 지난번 남자답지 못한 짓이 마음에 걸려 그 주막에 들렀다. 그렇게 자신을 유혹하던 주모가 쌍심지를 켜고 삿대질을 하며 이원수를 내쫓았다. 지난번엔 주모가 전날 밤 꿈에 황룡이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가 하루가 지나기 전에 잉태하면 큰 인물이 태어날 터였다. 장돌뱅이만 오가는 주막집에 갓을 쓴 이원수가 들어오자 바짝 매달렸는데 한사코 뿌리쳐 절호의 기회를 놓쳐 이를 갈았다. 꿈 약발이 다 떨어진 이제야 찾아오니 천하의 밉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야사에 따르면 이원수가 지난번 강릉으로 내려갈 때 그 귀한 씨를 그렇게 매달리는 주모한테 뿌리지 않고 고이 간직해 부인에게서 낳은 셋째아들이 이율곡이다. 아홉번 과거를 봐 아홉번 모두 장원으로 합격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천하의 큰 인물이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알려졌지만 솔직히 말해 현모(賢母)임에는 틀림없지만 양처(良妻)라 할 수는 없다. 남편 이원수는 여러모로 부인에게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과거는 봤다 하면 낙방이고 파주에서 머나먼 길을 걸어 강릉 처가에 가면 밤에 부인을 안는 것 말고는 그림 그리는 부인 곁에 쪼그려 앉아서 먹을 가는 일이 전부였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19세에 이원수를 남편으로 맞았다가 얼마 후 아버지가 이승을 하직하자 3년상을 치르고 신사임당은 정든 고향 강릉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대관령을 넘어갈 때 그 유명한 사모곡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 탄생했다. ‘늙으신 어머니를 고향에 두고 외로이 한양으로 가는 이 마음….’

이원수는 과거에 계속 낙방하자 우의정으로 있는 당숙 이기를 찾아갔다. 이기가 윤원형과 결탁, 을사사화를 일으킨 간신임을 간파한 신사임당이 간곡히 만류하자 결국 받아들여 훗날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원수는 천박한 주모 권씨와 바람을 피웠다. 사임당 어머니 기일에도 권씨를 끼고 술을 마시다가 찾아나선 사임당에게 똑바로 걸리기도 했다. 신사임당은 죽을 날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고 유서를 썼다. 남편에게 4남3녀를 낳아줬으니 재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원수는 부인한테 한평생 눌려 살던 걸 한풀이라도 하듯 신사임당이 죽자 주모 권씨를 데려와 안방에 앉혔다.

일곱자녀가 아무도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셋째 이율곡은 삭발을 하고 아버지도 모르게 금강산으로 들어가버렸다. 잠깐의 승려생활이지만 이것은 훗날 억불숭유(抑佛崇儒)를 국가 기조로 삼았던 조선에서 두고두고 정적의 시빗거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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