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창작도 하는 '해리포터' 번역가 "이야기를 사랑해요"

한겨레 2022. 8. 1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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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Book] 번역가를 찾아서]번역가를 찾아서강동혁 번역가
강동혁, 번역 이끈 '형사 킴 스톤' 등
판타지 등 재밌는 이야기에 꽂혀
주말엔 판타지 웹소설 창작에 몰두
강동혁 번역가.

판타지 소설을 옮기는 번역가는 현실과 이세계를 동시에 산다. <해리 포터> 시리즈 20주년 개정판을 작업하는 3년 동안 강동혁 번역가는 런던 킹스크로스역 9와¾ 승강장을 통해 호그와트로 향하는 해리처럼 매일 아침 서재의 문을 열고 조앤(J.) 캐슬링(K.) 롤링이 촘촘하게 짜놓은 마법세계로 들어갔다. 꼬박 8시간 동안 해리와 모험하며 ‘머글’로 살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해리 포터>를 읽은 남자가 이상형”이었던 아내 곁으로 돌아왔다.

“호그와트의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을 번역하면서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음식의 모양과 냄새, 맛을 상상하며 일하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와 한식을 먹고 나면 곧장 파티로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아요.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 충분히 몰입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면 가급적 오래, 쉬지 않고, 빠르게 작업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것 또한 예삿일은 아니다. “덤블도어 교장이 불을 끌 때 쓰는 발명품 이름이 ‘딜루미네이터’(Deluminator)인데, 부정접두어 디(De)와 조명기(illuminator)의 합성어니까 영어권 독자들은 이름만 들어도 어떤 도구인지 감이 오죠. 하지만 우리말로는 뜻을 살려 ‘불끄개’라고 하자니 마법도구의 신비로운 느낌이 사라지고, 음차해서 ‘딜루미네이터’라고 하면 너무 게으른 번역 같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어요. 판타지 소설 특유의 수많은 신조어를, 의미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면서도 분위기를 잘 살리도록 옮기는 게 관건이에요.”

어떤 판타지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등장 인물과 설정을 포스트잇에 적어 온 방에 빽빽이 붙여둔다는데, 판타지 번역가는 그 포스트잇을 떼어 엑셀 시트의 첫 열에 정렬한 다음 둘째 열엔 원작을 토대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자막을, 셋째 열엔 이전에 출간된 번역서의 표현을 적어두고 비교·분석한 후 넷째 열을 비로소 자신의 언어로 채운다. 이렇게 완성된 파일은 대부분 ‘시리즈’로 출간되는 방대한 분량의 판타지 소설을 탐험하는 번역가에게 요긴한 지도가 되어준다.

손수 만든 지도를 들고 마법사와 용이 사는 세상을 누비는 번역가의 소감은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강동혁 번역가가 “이야기를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읽고, 다른 이에게 들려주고, 직접 만들다가 번역가가 되었다.

“일곱 살 때 책에서 비버는 나무를 갉지 않으면 이가 계속 자란다는 내용을 보고, 게으른 비버가 나무 둥치에서 잠을 자다가 갉지 않은 이가 나무에 박혔는데 산불이 나서 큰 위기에 빠지는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들려줬더니 재미있다는 거예요. 그때 ‘이야기’에 꽂혔던 것 같아요.”(웃음)

중학교 때는 같은 반 친구들이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을 매일 조금씩 써서 학급 인터넷 카페에 올려놓았는데, 어제 이야기의 주인공이 오늘 학교에서 화제의 중심 인물이 되자 너도나도 등장시켜달라고 조르는 통에 수줍음 많던 그는 순식간에 ‘인싸’(인사이더)가 됐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한 후에는 어쩐지 “캐릭터와 작품이 가진 사회적 의미와 메시지”에 신경이 쓰여 창작활동은 다소 느슨해진 반면, 영문학 복수 전공에 이어 영문과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양한 영문학 작품을 읽고 보는 눈”이 생겼다. 그때 읽은 책 중에 앤절라 마슨스의 ‘형사 킴 스톤 시리즈’가 재밌어 출판사에 번역·출간을 제안했다가 “우선 이 책부터 해보자”는 편집자의 권유로 나온 것이 강동혁 번역가의 출판 데뷔작인 앨런 에스킨스의 미스터리 소설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들녘, 2015)이다.

첫 번역서 출간은 그에게 “이렇게 재밌는 얘길 남보다 먼저 읽고 (우리말로 옮겨)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돈도 벌 수 있다니 꿈만 같다”는 감동을 안겨 주었고, 그는 이후 재미있고 환상적이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을 한 달에 한 권꼴로 번역, 지금까지 총 38종 100여 권의 책을 냈다. 그중에는 남들에겐 ‘딱딱한 법철학 서적’으로 읽히지만 그에게는 “다양한 판례들이 흥미로운 이야기처럼 느껴져 재미있게 본” 마사 누스바움의 저서도 있고, 작가 지망생이라면 필독해야 할 법의학 책도 있다. 한편, 애초 그를 번역가의 길로 안내한 ‘형사 킴 스톤’ 시리즈는, 그가 직접 1인 출판사(품스토리)를 설립해 기어이 내놓고야 말았다. 요즘은 평일엔 번역을 하고, 주말엔 판타지 웹소설을 창작해 필명으로 연재 중이다. 한주 내내 ‘이야기’ 속에 사는, 행복한 이야기꾼인 셈이다.

글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사진 강동혁 제공

<해리포터> 시리즈 20주년 개정판(J. K. 롤링, 문학수첩, 2015)

시리즈의 오랜 팬인 강동혁 번역가가 해리 포터에게 보내는 정성스런 팬레터와도 같은 책. 영화는 물론 영어 원서까지 꼼꼼히 섭렵한 마니아 독자들에게 “번역이 매끄럽고 오역이 모두 수정되었으며 대화체가 자연스럽다”는 평을 받았다.

<미스터리 작가를 위한 법의학 Q&A>(D.P. 라일, 들녘, 2017)

미국 드라마 <CSI> <로앤오더> <하우스>의 자문 의사인 저자가 미스터리 작가와 연출자 들이 알아야 할 법의학 지식을 문답형식으로 엮었다. 강동혁 번역가가 집필에 도움을 받으려 읽었다가 너무 재미있어 출판사에 출간을 제의했다.

<혐오에서 인류애로: 성적 지향과 헌법>(마사 C. 누스바움, 뿌리와이파리, 2016)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 합헌 판결을 하기까지 차별과 혐오의 작동원리를 분석했다. 강 번역가가 출판사에 추천해 번역이 성사됐고, 이후 <분노와 용서>(2018), <세계시민주의 전통>(2020)까지 저자의 책을 연달아 번역하는 계기가 됐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앤디 위어, 알에이치코리아, 2021)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영화 <마션>의 원작자로 유명한 앤디 위어의 3부작 에스에프소설. “외계 종족의 생태를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섬세하게 묘사”한 점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독특한 외양만큼이나 특이한 외계인의 말투를 옮기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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