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의 뉴스 읽기] 심판대 오른 ESG… “기업이 자발적으로 선한 행동하겠나”

한삼희 선임 논설위원 2022. 8. 1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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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경영, 기업의 위선인가

요즘 자주 등장하는 ESG란 환경(environment), 사회(society), 지배구조(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모은 축약어다. 기업이 주주의 금전 이익만 추구해선 안 되고 환경 보호, 사회 공헌, 투명 경영을 통해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ESG의 비(非)재무적 요소가 중·장기적 기업 가치에 점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므로 ESG를 고려해 투자, 대출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ESG 경영 자체, 또는 ESG를 표방만 했지 실제론 ESG와 거리가 먼 행태를 보이는 위선적 경영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고 있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州)는 지난달 28일 ESG 원칙에 따라 석탄 등 화석연료 산업 투자를 줄여가고 있는 골드만삭스, JP모건, 블랙록 등 월스트리트 금융사 5곳과 거래를 끊겠다고 발표했다. 웨스트버지니아주는 이미 지난 1월 블랙록에 맡긴 2000만달러를 회수했다. 하루 전인 27일엔 플로리다 주정부가 환경을 앞세우는 펀드들에서 주 연금 기금을 빼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아이다호, 유타 등을 포함해 미국의 15곳 안팎 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영국 런던에선 HSBC 책임 투자 전담 임원이 지난 5월 파이낸셜타임스 콘퍼런스에서 ‘투자가들이 기후 리스크를 걱정할 필요 없는 이유’란 발표를 해 물의를 빚었다. 그는 “마이애미가 100년 뒤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해도 왜 그걸 지금 걱정해야 하냐”고 주장했다.

ESG 비판이 큰 흐름을 이루자,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21일 ‘ESG, 고장 난 시스템에 긴급 수리 필요’라는 특집을 실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누가 ESG를 제대로 실천하는지 평가하는 것부터 혼란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600개쯤 있는 ESG 평가 기관들은 E, S, G의 세 부문별로 수십 개씩 세부 항목으로 나눠 평가한다. 문제는 비교 불능의 세 분야를 어떻게 종합해 계량화하느냐는 것이다. 평가 기관마다 뭘 평가해야 할지, 부분 지표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등에 대해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합산 혼란(aggregate confusion)’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투자 컨설팅 회사인 리서치어필리에이츠가 2020년 미국 대기업 20곳을 상대로 시행한 ESG 평가 기관 2곳의 점수를 대조해봤다. 결과는 완전히 엇갈렸다. 페이스북에 대해 한 곳은 환경 항목에서 77점을 줬지만 다른 평가 기관은 23점을 매겼다. 아마존의 지배구조 점수는 54점과 19점으로 갈렸다. 불법 계좌 개설 스캔들에 휘말렸던 웰스파고 은행의 지배구조 점수는 70점과 3점으로 극과 극이었다. 평가사들이 각자 자기들만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자료를 수집해 독자적 알고리즘으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FT도 6월 6일 자 ‘심판대 오른 ESG 투자’라는 기사에서 “ESG 용어가 나온 지 20년도 안 됐는데 이미 쓰임새가 끝나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ESG 혼란이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 국가들은 윤리 원칙(S)에 입각해 러시아산(産) 가스를 배격하려다 보니 석탄 같은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아져 기후 원칙(E)을 위배하게 됐다. 또 ESG 투자는 무기 산업을 배제해왔으나, 우크라 전쟁 이후 ‘주권을 지키기 위한 방위산업은 지속 가능 투자로 분류돼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우크라 전쟁 이후 화석연료 기업들이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천정부지 이익률을 올리고 있는 것도 ESG 투자가 흔들리는 이유 중 하나다. ESG의 전도사 역할을 하던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 블랙록은 지난 5월 초 발표한 투자 지침에서 “투자 기업들의 다음 주주총회에서 기후 대책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밝혔다. 블랙록은 연기금 등 자산을 무려 10조달러 관리한다. 한국 국가 GDP의 여섯 배다. 블랙록 CEO 래리 핑크가 2020년 1월 “기후변화 리스크와 ESG를 투자 결정의 핵심 고려 사항으로 반영하겠다”고 선언하면서 ESG가 세계 금융기관과 기업의 새 패러다임으로 등장했다. 그 블랙록이 “과도한 기후변화 대책은 고객사들의 재정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5월 28일 자 ‘의식화 자본주의(woke capitalism)에 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기사에서 ESG 투자에 대한 보수 정치 진영의 비판을 집중 조명했다. ‘워크(woke)’는 ‘깨어있다’는 의미인데, ESG 등 진보 의제를 들고나온 엘리트 기업인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공화당 인사들은 주로 블랙록을 타깃으로 삼았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차에) 기름을 넣을 때마다 ESG 압력으로 기름값을 높인 (블랙록 CEO) 핑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비꼬았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ESG는 사기”라고 주장했다. S&P500 ESG 지수에서 테슬라가 빠지고 석유 회사 엑손모빌이 들어가자 흥분한 것이다. 테슬라의 일부 공장에서 벌어진 인종차별과 열악한 근무 조건 논란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ESG 경영이 기업의 그린 워싱(green washing·위장 환경주의)을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들도 제기됐다. 환경 친화적이지 않은 기업들이 ESG 평가 항목만 억지로 끼워 맞춰 친환경 기업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가 기관들이 기업 대상 컨설팅까지 하게 되면서 기업과 평가 기관 간 친환경 분식(粉飾)을 위한 공모가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5월 31일 독일 검찰은 자산 운용사 DWS가 홍보해온 ESG 투자가 거짓이라는 내부 고발이 제기된 후 DWS를 압수수색했다. 6월엔 골드만삭스가 ESG 펀드에 관해 미국 증권거래소(SEC)의 조사를 받고 있는 사실을 공개했다.

미국과 유럽의 금융 감독 기관들은 그린 워싱으로 인한 투자자 피해를 막기 위해 평가 표준화와 공개 의무화 제도들을 만들고 있다. SEC는 기후 정보 공시 지침 초안을 발표했고, EU는 유럽 기업들과 연계된 국외 공급망 기업들에 대한 인권, 환경 분야 실사 의무화 방안까지 검토에 들어갔다. 한국 금융위원회도 2025년부터 ESG 정보 공시를 의무화한다고 예고했다.

ESG의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ESG 점수를 높게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이다 보면 결과적으로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게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업의 사회적 기여를 북돋는 관행과 제도는 기업들로 하여금 기후, 직장 내 성차별, 협력 업체의 이익, 지역사회 기여 등을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타리크 팬시 블랙록 전 투자책임자]“ESG는 마케팅 허풍”

타리크 팬시(Tariq Fancy·사진)는 블랙록에서 2017~2019년 지속가능투자 책임자로 일했던 사람이다. ESG 투자로 기후 대책과 불평등 해소에 기여해보겠다는 생각에서 블랙록에 합류했다. 그가 작년 3월 USA투데이 기고, 영국 가디언 인터뷰 등을 통해 “ESG는 마케팅 허풍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린 워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캐나다에서 저개발국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 디지털 교육 플랫폼 보급 운동을 하고 있다. 작년 8월엔 ‘지속 가능 투자자의 비밀 일기’라는 A4 70장 분량 에세이를 공개했다.

팬시는 “펀드 매니저들은 탄소 배출을 줄이는 투자를 하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로 돌아가선 ESG 자료는 보려고도 않고 최대 이익을 내는 투자에 골몰한다”고 했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려면 탄소세 같은 보편적 시장 규칙을 활용한 시스템적 해법으로 수백만 기업과 수십억 인구의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팬시의 주장이다. ESG는 그게 아니라 일부 기업의 자발적 실천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오도했고, 자신도 그에 일조했다고 반성했다. 기업이 자발적으로 할 것이라는 기대는 위험한 환상이고, 기업들이 자기들 이익을 보장해주는 현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그런 환상을 퍼뜨린다는 것이다. 팬시는 ESG를 화학요법 치료가 절박한 암 환자에게 민간요법의 거짓된 희망을 퍼뜨려 암을 더 번지게 만드는 것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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