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묵묵] 불쌍한 놈, 위험한 놈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2022. 8. 1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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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놈이 위험한 놈 되는 순간
자선통치자가 공안통치자 돌변
‘이건 뭐지’ 하고 벙찌는 일이지만
두 얼굴의 통치자는 늘 이럴 위험
지금 이 땅에도 징후가 농후하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00일.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바닥이다. 실망한 사람, 분노한 사람이 70%에 육박한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느낀 감정은 실망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내 감정은 당황과 황당 사이를 자주 오갔다. 얼빠진 사람처럼 “이건 뭐지?” 하고 ‘벙찌는’ 일이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에서 그랬다. 어느 월요일 아침 대통령은 기자들과의 짧은 문답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발걸음을 로비 쪽으로 돌린다. 그러고는 기자들이 보는 가운데 거기 걸린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작품명과 작가명도 빠짐 없이 확인한다. 모두가 발달장애인 작가들의 작품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장애인 예술가들이 소외되지 않고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기 위해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대통령의 철학이 반영된” 전시라고 한다. 이들의 소외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매일 여론의 관심을 받는 이곳을 일부러 전시 장소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장애인 작가들에게 전시는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을 알리는 기회”이고, 이는 “행복추구권에서 출발하는 권리”로 “우리가 이 권리를 잘 지켜드려야 한다”고도 했다.

신문사와 방송국 카메라가 모여 있는 곳에서 장애인의 소외된 현실을 알리는 대통령, 세상과 소통하려는 장애인의 욕구를 헌법이 보장한 행복추구권으로 이해하는 대통령, 장애인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촉구하고 다짐하는 대통령. 나는 왜 이 자상하고 세심한 지도자의 모습에 ‘벙쪘는가’. 그것은 그가 불과 넉 달 전 인수위 사무실 앞에서 절규하던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요구를 외면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려 500여명의 발달장애인 가족들이 삭발을 하며 발달장애인에 대한 24시간 지원체계를 구축해달라고 요구했다. “제발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거나 동반자살하는 일을 막아 달라”고, 발달장애인도 이 사회에서 함께 살 권리가 있다고, 그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때 그는 그것을 외면했다. 그런 그가 장애인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몸소 카메라 앞에서 작품 관람 장면을 연출한다. 또 이런 그가 정작 연일 보도되고 있는 장애인들의 출근길 투쟁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이건 뭐지? 그의 세심함은 당혹스럽고 무심함은 황당하다. 장애인 복지예산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3분의 1도 안 되는 현실을 바꿔달라는 요구에 대해 “장애인 예산 요구 다 들어주면 나라 망한다”고 말하는 기획재정부 장관 이야기를 듣다가, 예술작품 구매 예산을 장애인 작가들에게 우선 배정하겠다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야기를 듣다가, 겨우 집 바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해달라고 투쟁하는 장애인들을 향해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지구 끝까지 찾아가” 처벌하겠다는 서울경찰청장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 감정은 당황과 황당 사이에서 주저앉는다.

며칠 전 폭우로 인한 재난 상황 때도 그랬다. 장애와 여성, 가난이 함께 발버둥치다가 숨진 반지하방의 창문을 바라보며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서울시장과 대화를 나누던 대통령. 대화의 모습도 내용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게는 이때의 모습이 로비에 걸린 장애인의 그림을 두고 대변인과 대화를 나누던 관람자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소외된 자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고 사람들의 눈길이 닿는 곳에 그 고통을 걸어두는 이 선한 관람자는 자신이 그것에 책임이 있는 당국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관람자로서는 고통을 들여다보지만 당국자로는 고통을 외면한다. 불쌍한 자에게는 연민을 느끼고 적선하지만, 권리를 주장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자에게는 법과 원칙을 내세운다. 관람자로서는 자선가이고 당국자로서는 공안통치자다.

장애 역사학자인 앙리-자크 스티케는 중세의 몰락과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중세는 자선 시스템을 통해 빈민과 장애인을 관리하는 사회였다.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에 대한 적선을 통해 구원을 얻고, 가난한 자는 부유한 자의 적선을 통해 생존을 이어갔다.

이 시스템은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삶이 피폐해진 가난한 자들이 구걸하지 않고 봉기를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이 ‘불쌍한’ 놈들이 아니라 ‘위험한’ 놈들이 되는 순간, 그러니까 이들이 통치자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서 자선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개념으로 ‘공안’(securite)이 등장했다. 이런 놈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겠다며 자선통치자가 공안통치자로 돌변한 것이다. 칭송받지 못하는 자선가, 책임을 추궁받는 통치자에게는 언제나 이럴 위험이 있다. 지금 이 나라에도 징후가 농후하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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