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정치의 앙시앵 레짐을 어떻게 전복시킬까

국제신문 2022. 8. 1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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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대립의 양당 정치, 시대적 과제 해결 못해
승자독식 구도 타파 등 다원적 민주주의 필요

역사적으로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근대 사회로 탈바꿈하기 이전의 구제도를 의미한다. 중세의 봉건성과 절대주의 왕권으로 더 이상 국가체제가 운신하지 못할 때 계몽사상을 필두로 한 민중 봉기로 구제도는 타파되고 새로운 근대 시민사회가 탄생하게 된다. 우리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구제도의 망령이 여전히 정치적 진화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앙시앵 레짐은 무엇인가. 오래 묵어 더는 자연 치유가 불가능한 정치체제다. 정치는 병든 지 오래고, 어떤 이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체념 투의 한탄을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삶을 결코 포기할 수 없듯이 공동체 영속과 미래를 담보하는 정치를 포기하는 건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응급 요법이 가장 시급한 건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치는 대통령의 지지도다. 분명 잘못되었다. 지금 많은 국민이 윤 정부의 인사도, 정책도 부정적으로 여긴다. 윤 정부 탄생 배경에는 이전 문 정부에 의해 허물어진 정의와 질서를 바로 세워달라는 많은 국민의 염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결과 대안 세력으로 위축되고 쪼그라진 정당 정치인이 아니라 상식과 공정을 바로 잡기 위한 법치적 엄정함을 갖춘 것으로 기대됐던 검찰 출신의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으로 등장했다. 말하자면 문 정부에 대해, 에즈라 클라인이 언급한 “적대적 당파성”(negative partisanship)이 윤 정부를 탄생시킨 셈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적대적 당파성의 유효 기간은 정권교체로서 이미 실효성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윤 정부 100일이 지났지만 대한민국 미래를 이끌어 갈 대안 세력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전략적 가치와 미래적 상상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다가 정치적 언어는 천박하고 국민을 대하는 태도는 불손하기조차 하다.

여당은 소위 ‘윤핵관’이 아니면 소수 의견조차 내지 못하며, 야당은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독주함으로써 우리 정당은 소수 정치 엘리트가 주도하는 과두제 통치로 치닫는 중이다. 내부 권력다툼이 정치의 본연이 되는 상황이고, 대통령은 취임 석 달이 다 되도록 야당 대표와 대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이런 비정상적·비정치적 상황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민주 정치는 타협과 협상을 매개로 이견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들 간의 비영합적(non zero-sum) 게임을 전제로 하지만, 윤 정부는 이런 정치 게임 논리를 주도할 포용력이나 사고를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대통령 핵심 인사에 상당수 검찰 등 법조인이나 관료 출신이 채우고 있을 뿐, 경륜 있는 정치인이나 시민사회 출신의 명망가를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다. 윤 정부가 내건 법치주의의 이면에는 국회나 정당을 법정화해 이기고 지는 승패의 장으로 인식하는 법률주의나 법정주의만 팽배하다. 이러한 ‘형식적’ 법치주의에 치중하다 보니 타협과 설득에 의한 정치적 정당성이 핵심인 ‘실질적’ 법치주의 확보를 위한 고민이나 노력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낡은 정치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으며, 결국 상대가 못해야 지지도가 올라가고 급기야 집권하는 어처구니없는 ‘바보 같은’ 정치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 정치의 앙시앵 레짐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87년 체제의 전환이 정치개혁의 시발점이 돼야 한다. 87년 체제는 이미 극한적 대립의 양당정치로 이미 그 생명력을 잃은 지 오래다. 정치 싸움의 규칙도 바꾸어야 한다. 양당제에서는 정권이 바뀌어도 발목잡기만 할 테고, 정치 기득권만 유지될 뿐이다. 정권교체 후 상대에 대한 복수정치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급격한 산업 전환기의 과제나 국제정치상의 난맥상을 해결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제왕적 권력집중의 분산, 대통령중임제(또는 내각책임제), 대선 결선투표제, 비례대표 확대 등으로 정치제도의 쇄신이 요구된다. 승자 독식 구도를 타파해 기득권 양당 체제의 청산을 통해 정치의 다양성과 유연성을 창출하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구축하기 위한 개헌 논의가 당장 시급하다.

막강한 IBM을 꺾고 애플이 등장하게 된 건, 기술의 우수성보다도 대안적 세상의 가치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화와 정치의 진화는 다른 듯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정치의 진화 역시 단순히 새로운 제도나 정책을 제시하는 것보다 그 제도와 정책에 어떤 비전과 가치를 담는가에 따라 성패가 갈라진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는 지금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고 느낀다면 대안적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권한다. 입으로만 떠드는 공정과 상식이라는 빈껍데기 구호에 어떤 내용을 채울 것인가.


끝으로 취임 100일을 맞이한 윤 대통령께 한 말씀 드린다. 진정 훌륭한 리더란, 생각은 속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같이 깊고, 말은 천근의 추를 매단 듯 무거우며, 행동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칼날 같아야 한다고.

박재욱 신라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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