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반도 공화국의 훼방일지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2022. 8. 1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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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정치인 줄리오 안드레오티(사진)는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 <일 디보> 시사회에 초대되었다. ‘신이 내린 남자’란 뜻의 ‘일 디보’는 안드레오티의 별명이었다. 그는 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총리직을 7번이나 역임한 거물 정치가였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영화는 안드레오티를 동료일지라도 방해가 될 때는 주저 없이 처치하는 잔혹한 마키아벨리스트라 고발하고 있었다. 스크린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불쾌한 영화였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답게 조용히 극장을 나왔다. 미수의 노신사는 서운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왜곡될 것이 우려됐다. 엉망이었던 영화계를 회생시킨 공로자를 우롱한 감독 녀석이 괘씸했다.

안드레오티는 파시즘으로 불구가 된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려 노력한 공화주의자였다. 그의 정치적 감각과 과감한 행정 능력이 처음 발휘된 곳은 문화계였다. 문화부 차관으로 부임했을 당시 이탈리아 영화계는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극장에는 미국 영화가 진을 치고 있었고 조악한 이탈리아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안드레오티법’을 제정해 미국 영화 수입을 제한하고 자국 영화 제작사에 제작비를 융자해 주었다.

안드레오티는 이탈리아 영화의 부흥을 위해 특이한 검열을 도입했다. 반정부적 색채를 띤 영화를 걸러낼 목적보다도 흥행이 될 영화 생산을 위한 정책이라 선전했다. 정부가 나서 재미없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솎아낸 예는 전무후무하다. 안드레오티법 덕에 이탈리아 영화산업이 활기를 띤 것은 사실이나 질적으로는 민망한 수준의 영화가 많았다.

안드레오티의 영화 진흥책에는 명암이 공존했다. 미국 영화의 공세에서 자국 영화를 보호한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나 대중의 비판 의식을 무력화하려는 술책이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이후 안드레오티의 정치적 행보에 화제와 추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것을 보면 무리한 의심도 아니다.

<마테이 사건>은 사업가 엔리코 마테이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추적한 영화다. 진실을 밝히려던 기자가 실종됐고, 기자를 찾던 경찰마저 괴한에 피살됐다. 프란체스코 로지 감독은 <마테이 사건>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 번지는 불길한 전조를 경고했다. 감독의 불안한 예감은 총리 알도 모로가 납치·살해되면서 현실화되었다.

이탈리아는 테러의 배후를 밝히는 데 게을렀고 여파는 정계의 막장스러운 부정부패로 귀결되었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이 테러의 배후 인물로 의심받아왔던 안드레오티를 주인공으로 <일 디보>를 제작한 배경이다.

1992년에 시작된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는 2년에 걸쳐 수많은 정치인과 기업인을 구속시키며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검찰의 부정부패 척결 작업이었다. 사정을 지휘한 디 피에트로 검사는 국민적 영웅이었다. 은신의 귀재 안드레오티의 비리도 이때부터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피아와 내통하며 이익을 챙기고 권력을 유지했던 안드레오티는 무죄 선고로 풀려났지만 국민 대다수는 유죄라 믿고 있으며 그가 이끌던 기독교민주당은 몰락했다.

이탈리아 국민은 검찰의 ‘깨끗한 손’으로 정치계가 말끔히 정화되었다고 방심했다. 1994년 총선에서 보수층의 절대적 지지 속에 언론 재벌 베를루스코니가 총리로 등극했다. ‘마니 풀리테’에 실렸던 희망은 초라하게 꺼졌다. 트럼프의 매운맛 버전인 베를루스코니는 이전 정치인들의 악습을 빠르게 답습하며 나라를 빠르게 망가뜨려갔다. 9년의 재임 기간 동안 이탈리아는 유럽의 후진국으로 후퇴했다. <일 디보>는 베를루스코니가 세 번째로 총리 취임하던 해에 제작되었다. 영화는 반도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훼방되어 왔고 훼손되었는지를 기록한 시청각 일지라고 할 수 있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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