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말복
태양이 서산 뒤로 넘어갈 때 나도 서둘러 자유로를 달려 귀가한다. 파주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몇 개의 다리 중에서도 마곡·당산·한강·동작 철교는 조금 특별하다. 전동차와 교차하기 때문이다. 그 긴 기차와 무슨 운명처럼 만났다가 어긋날 땐, 운전대에서 오른손을 거두어 거수경례를 한다. 거수경례는 그야말로 손을 들어 공손함을 표시하는 행위다. 경건히 예의를 갖춘다는 뜻의 경례. 예(禮)는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논어>와도 긴밀히 연결될 것이다.
거수경례란 검지로 눈썹을 문지르는 동작이기도 하다. 초승달이 떠오르는 손톱 아래의 지문으로 방풍림처럼 짙게 도열한 눈썹 주위를 더듬는 작업이다. 전방에는 엉덩이가 발달한 승용차들뿐이니 나의 경례를 받아주실 마땅한 상대는 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는 건 아닐 것이다. 그 정도는 이제 나도 안다. 허공에서 누구든 응대해 줄 것이라 믿으며 고개도 좌우로 조금 돌린다. 오늘은 외할머니께서 척 받아주시는 것 같다.
한강을 가로질러 멍하게 엎드린 철교, 그 위를 헐레벌떡 지나다니는 전동차. 이들은 그 재질이 거의 같다. 외국에서 수입한 부품도 일부 있겠지만 대부분 이 땅의 지하자원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물론 우주의 먼지가 집적(集積)된 나의 몸 또한 예외가 아니다. 전동차-철교-인체는 모두 자연계의 원소들이 조금씩 비율을 달리하여 모이고 뭉친 결과물이다. 따라서 덜컹덜컹 전동차가 철교를 건너면서 내는 굉음에 이 구성성분들은 아주 잘 서로 진동하고 간섭하고 공명한다. 그리고 하나의 파동이 되어 나를 뚫고 멀리 퍼져나간다. 이로써 나의 생각은 하늘에서 내려왔고, 나의 몸은 지하에서 올라왔음이 증명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억세게 운수 좋은 날이었다. 네 다리에서 모두 전동차를 만나서 네 분에게나 예의를 갖췄다. 눈썹의 뿌리가 잠시 흔들렸던가. 존재의 밑동이 우지끈 꿈틀거렸던가. 거수경례하는 순간, 나의 어느 한 꼭지점과 나는 직접 접촉하고 있는 셈이다. 석양에 흠뻑 젖은 나의 남루한 실체가 잠깐 드러난 때이기도 하다. 그러자 붐비는 세상에서 내가 모처럼 뚜렷하게 서 있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아, 그것은 너무나도 뒤늦은 이립(而立)! 오늘(8월15일)은 말복이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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