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무죄가 아니라, 유죄를 선고할 수 없을 뿐이다
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2013년 당시 검찰 고위 인사와 관련된 성 접대 영상이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 해당 성 접대 영상과 관련된 범죄 혐의에 대해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했다. 당시 영상에 나온 여성이 2014년 검찰 고위 인사를 성폭행 혐의로 다시 고소했지만 검찰은 또 무혐의 처분을 했다. 이 여성은 검찰 불기소 처분이 잘못되었다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했지만 법원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신청을 기각했다. 이후 6년이 지난 2019년 6월 검찰은 해당 인사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지난 11일 무죄를 확정했다.
이로써 해당 인사와 관련된 모든 혐의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무죄, 면소(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에 대해 법원이 하는 판단)로 종결되었다.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당일 법조인 한 분이 필자에게 물었다. “수많은 무죄 판결 중에 과연 정말 무죄(Innocent)가 얼마나 있을까요?” 그렇다. 정말 죄가 없어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아니다. 의심은 가는데,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유죄 확신이 들지 않아 무죄(Not Guilty)를 선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무죄가 선고되면 피고인은 어떠한 잘못도 없는 듯 당당하게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신 법원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한다”라며 언론에 브리핑을 하는 모습에 국민 역시 “저 사람 무죄 받았네… 깨끗한 사람이었구나”라며 기존 인식을 바꾸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분명히 맞지 않는 인식 차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어떨 때 판사가 유죄를 선고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형사사건에 임하는 판사는 선입견 없이 마음에 흰색 도화지 한 장을 들고 재판정에 간다.
판사는 먼저 검사의 공소장 낭독을 듣게 된다. 다음으로 피고인의 진술을 듣는다. 판사가 처음 사건을 접하는 순간이다. 보통은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검사는 죄가 있다는 주장을, 피고인은 죄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검사는 유죄 증거를, 피고인은 무죄 증거를 법원에 제출한다. 제출된 증거를 통해 판사는 유·무죄의 심증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형사소송법 원칙이 등장한다. 유죄의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고, 판사가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서는 50%의 확신으로는 부족하다. ‘합리적 의심을 넘는 고도의 개연성’ 즉 80~90%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헌법에서 천명하고 있는 무죄추정원칙 때문이다. 헌법 제27조 4항은 “형사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판사는 마음에 있는 흰색 도화지에 유죄 증거가 80~90% 채워졌을 때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 만일 도화지에 유죄 증거가 60~70%밖에 채워지지 않았다면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유죄를 선고할 수 없게 된다. 무죄를 선고할 수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한 명의 억울한 피고인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규정된 여러 형사법 원칙 때문에 무죄가 선고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무죄가 아닌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틀렸다.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로 선고하는 것이 사실에 합치하고 정의에 부합한다.
형사소송법 제325조는 “사건이 범죄로 되지 아니하거나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는 판결로써 무죄를 선고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건이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경우는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로 법조문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검찰 고위 인사 사건은 무죄(Innocent)가 아니다. 유죄를 선고할 수 없어 무죄(Not Guilty)를 선고 했을 뿐이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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