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사면은 판결이 아니라 용서다

이진명 2022. 8. 19.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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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리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 위해 사면권 부여
MB·김경수 광복절 특사 안한 건
민생·지지율 때문이라 했지만
尹대통령, 소중한 기회 놓친 셈
2012년 10월 카리브해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샌디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했다.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가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을 보름 앞두고 선거운동에 한창이었다. 백악관과 선거캠프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첫째 선거운동을 중단해야 하나, 둘째 긴급자금을 지원할 것인가.

참모들은 선거운동은 지속해야 하고, 긴급자금 지원은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는 공화당의 릭 스콧, 보비 진덜 주지사가 각각 터를 잡고 있어서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워낙 많은 돈을 풀어놓은 터라 재정 여력을 아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참모들 반대를 무릅쓰고 선거운동을 중단한 채 수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민주당, 공화당 가리지 않고 이재민을 끌어안으며 지원을 약속했다.

합리적으로 따지면 참모들 조언이 합당하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합리를 뛰어넘는 '박애'라는 결단을 했다. 선거에 도움이 안되는 지역이라도 미국 국민이기에 품어 안기로 했다. 이런 결단은 최고 리더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임명직 관료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선출직 대통령만의 특권이다.

이 장면은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특별사면과 대비됐다. 광복절 특사의 화두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경수 전 경남지사였다. 법무부 사면심사위원회는 이 전 대통령과 김 전 지사를 사면 대상에서 배제했고, 윤 대통령은 법무부에서 올린 명단 그대로 서명했다. 법무부와 사면심사위원회의 결정이 아마도 법리에 가장 부합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법리에 근거해 사면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와 '화해'를 바탕에 두고 사면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한 건 문재인 대통령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김대중 당선인의 건의로 김영삼 대통령이 사면했다. 상식과 이치로는 잘 설명되지 않지만, 그 결단은 용서와 화해를 상징한다. 그래서 특별사면의 권한을 대통령 고유 권한으로 둔 것이다. 법리에 맞는 사면만 할라치면 사면권을 굳이 대통령에게 줄 필요가 없다. 법무부 장관 선에서 해도 충분하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장본인 리처드 닉슨 전임 대통령을 사면하면서 "법률적 선례는 없지만, 덮인 책장을 열어 나쁜 꿈을 지속시킬 수 없고, 내가 그 책을 봉인할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대선이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미래 지향적으로 이제는 (전직 대통령이) 댁으로 돌아가셔도 되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었다. 올해 6월까지만 해도 "(전직 대통령을) 이십몇 년을 수감 생활하게 하는 건 안 맞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이번 8·15 특사는 윤 대통령 자신이 한 약속도 저버린 셈이다.

대통령실은 정치인 사면을 배제한 이유로 경제와 민생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정치인 몇 명 더 사면한다고 경제와 민생이 타격을 입을까. 혹자는 정치인 사면에 반대하는 여론이 많아 지지율 하락을 우려해 내린 결정일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치인 사면 반대 여론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 지지율은 25%. 이 전 대통령 사면을 원하는 사람들은 대개 25%에 속해 있을 것이고, 김 전 지사 사면을 원하는 사람들은 나머지 75%에 속해 있을 것이다. 사면을 포기함으로써 75% 국민 중 일부가 윤 대통령 지지로 돌아설 가능성이 차단됐고, 25% 국민 중 일부가 지지를 철회할 가능성만 높아졌다.

참모들 설득을 등지고 '박애'를 결단한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은 51% 대 47%로 밋 롬니 공화당 후보를 역전하고 재선에 성공했다. 용서와 화해를 선택하지 못한 윤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진명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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