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만원이면 탄생.. 너! 인기 비결이 뭐니

곽창렬 기자 2022. 8. 18.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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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Cover Story] 한국서 거센 가상인간 열풍..150여명 모델·가수 등 활동

지난 10일 프로야구 SSG랜더스와 KT위즈 경기가 열리기 직전, 인천SSG랜더스 필드 전광판에 20대 여성이 시구자로 등장했다. 그는 ‘와이티’라는 이름이 새겨진 흰색 유니폼을 입고 왼손에 야구 글러브를 낀 채 야구공을 힘껏 던졌다. 그러자 야구장 홈플레이트에 앉은 포수가 공을 받는 모습을 연출했다. 공을 던진 사람은 실제 인간이 아니라 신세계 그룹이 제품 홍보 등을 위해 만들어 낸 가상 인간이다. 스무살의 나이에 키 163㎝, 몸무게는 46㎏. 한국인이지만 다소 이국적인 얼굴을 지녔다. 외모와 스펙은 모두 신세계 그룹이 결정했다. 신세계 관계자는 “20대가 좋아하는 여성 가수 ‘비비’나 블랙핑크 ‘제니’와 비슷한 얼굴과 몸매를 반영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작업해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신세계그룹이 내놓은 가상인간 '와이티'가 시구하는 모습.

사람 얼굴이나 목소리, 신체의 일부나 전부를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통해 만든 가상 인간 열풍이 한국에서 유독 거세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탄생해 활동하는 가상 인간 수는 150여 명. 가상 인간을 만들어 관리하는 데 수십억원을 쓰거나 전담 조직까지 만든 기업들도 있다. 가상 인간이 TV광고나 소셜미디어에서 모델로 활동하는 것은 기본, 아이돌 가수 또는 배우로 활동하거나 TV 생방송 뉴스에 출연해 인터뷰까지 한다. 미국의 CNN은 ‘가상 인간(인플루언서)이 떠오르는 한국’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가상 인플루언서들이 팬덤을 형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익성 있는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가상 인간 열풍은 어디서 왔고, 어디까지 갈까.

스마일게이트가 제작한 가상인간 '한유아'.

◇ 가상 인간에 꽂힌 기업들… 한국서 거센 가상인간 열풍, 150여명 모델·가수 등 활동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가상 인간은 ‘로지’다. 2020년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탄생시켰다. 22세 나이에 키 171㎝, 몸무게 52㎏, 신발 크기 250㎜, 성격유형지표(MBTI) 유형은 ‘재기발랄 활동가형(ENFP)’으로 지정돼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14만1000여 명에 이른다. 올해에만 전속 모델로 8건, 협찬 제의가 100건 이상 들어왔고, 연간 20억~30억원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김진수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 이사는 “영국과 독일 등 유럽뿐 아니라 아랍에서도 출연해 달라는 문의가 들어온다”며 “협찬 요청은 너무 많아 다 소화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이더스 백승엽 대표, 이유리나 감독과 함께 포즈를 취한 가상인간 '로지'(가운데).

롯데홈쇼핑은 1년여 제작 기간을 거쳐 지난해 가상 인간 ‘루시’를 등장시켰다. 루시는 키 171㎝, 몸무게 55㎏, 스물아홉살에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모델이자 디자인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으로 정해졌다. 롯데홈쇼핑 사내 개발팀이 발랄·차분 등 분위기가 다른 3가지 콘셉트의 얼굴형을 개발했고, 이를 사내 직원을 상대로 투표에 부쳤다. 투표를 통해 현재의 루시 얼굴이 1위를 차지했다. 레깅스 차림으로 잠수교를 달리면서 유명세를 탔고, 홈쇼핑 방송에서 쇼호스트로 나섰다. 지난달에는 쌍용자동차의 신차 발표회에 등장해 10분간 차량 소개를 하고, 직접 차량에 올라타는 모습도 보였다. 드라마 제작사 초록뱀미디어와 전속 계약도 체결해 올해 하반기에는 드라마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가상 인간으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도 있다. 인공지능(AI) 기술 연구 기업 펄스나인은 지난해 11명의 가상 인간으로 구성된 여성 아이돌 그룹 ‘이터니티’를 등장시켰다. 서로 다른 외모는 지난 20년간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성 아이돌 사진 수십만 장을 인공지능에 투입하고 학습시켜 만들었다. 멤버 대부분은 키 160㎝ 후반이고, 모두 MBTI 유형이 지정돼 있다. 멤버 가운데 한 명인 ‘제인’은 이달 초 한 뉴스 채널의 생방송에 등장해 직접 율동을 선보이고, 앵커와 일대일 대담을 해 눈길을 끌었다. NH 농협은행은 ‘정이든’과 ‘이로운’이라고 이름 붙인 가상 인간을 제작해 정규 직원으로 채용했다. 이들은 홍보 모델로 활동하며 AI 사업 추진을 지원하는 업무도 맡는다. KB국민은행 등 다른 은행들도 가상 인간을 빨리 내놓겠다고 선언한 상황이다.

증권업계에는 가상 인간 애널리스트도 있다. 삼성증권은 실제 애널리스트 두 명을 가상 인간으로 제작해 매일 방송에 투입하고 있다. 인간 애널리스트가 분석한 글을 컴퓨터를 통해 입력하면, 가상 인간 애널리스트가 그대로 말한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애널리스트들이 워낙 바빠 방송 출연이 쉽지 않은데, 컴퓨터에 분석 자료만 입력하면 마치 애널리스트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석열 당시 후보를 가상 인간으로 제작한 ‘AI 윤석열’이 등장했다. 윤 대통령의 흔들거리는 몸동작과 손동작, 말투, 목소리 등을 비교적 생생하게 재현하며 유권자 질문에 직접 답해 눈길을 끌었다.

◇스캔들 없고, 늙지도 않는다

기업들이 가상 인간에 공을 들이는 것은 젊은 소비자 때문이다. 가상 인간을 광고 모델로 등장시킨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회사가 아무래도 보수적 이미지가 강한데, 가상 인간을 등장시켜보니 이미지가 꽤 젊어졌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가상 인간 개발 업체 클레온의 김성곤 부대표는 “아직 (가상 인간이) 잘 알려지지 않다 보니 로지나 루시 같은 가상 인간이 등장하면 대중의 눈길을 끈다”며 “특히 온라인상에서 MZ 세대를 중심으로 화제가 되다 보니 기업들도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비용이나 각종 리스크를 고려한 측면도 있다. 한번 개발해 놓으면 따로 몸값이 필요 없고, 나이를 먹지 않아 노화에 따른 변화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물리적인 공간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쉽게 등장할 수 있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음주운전이나 성추문 등 각종 스캔들에서 자유롭다는 점도 매력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상급 연예인은 몸값이 10억원이 넘는데, 폭력이나 음주운전 등 각종 리스크 때문에 불안하다. 가상 인간에 끌리는 이유”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SNS에 익숙하고, 각종 사이버 문화에 대해 오랜 기간 노출돼 있었던 점도 가상 인간이 발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다. 펄스나인의 허인경 홍보실장은 “우리나라가 IT 기술이 가장 발달한 국가다 보니 가상 인간에 대한 거부감도 다른 나라에 비해 적은 편”이라며 “더 많은 업체가 개발에 나서는 이유”라고 말했다. 한 시청자는 “어차피 실제 연예인도 TV나 온라인에서만 접하는 존재인데, 가상 인간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여성의 외모에 큰 관심을 두는 SNS 문화도 가상 인간 시장에 대한 관심을 키운다는 분석도 있다. 루시(키 171㎝)나 로지(171㎝)처럼 최근 등장한 가상 인간 상당수는 키 160대 중후반 이상에 예쁜 얼굴, 날씬한 몸매를 지닌 20대 여성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우리나라 SNS 이용자들이 젊고 예쁜 여성에 대한 관심이 특히 큰데,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맞아 떨어지는 여성 모델을 찾아내 계약하기가 쉽지 않다”며 “가상 인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외모를 설정할 수 있다 보니 관심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키 171㎝·콜라병 몸매 비밀은 ‘대역 모델’

물론 가상 인간이 우리나라에서만 인기 있는 것은 아니다. 브라질 최대 유통기업인 ‘매거진 루이자’가 2003년 제품 마케팅·홍보를 위해 만든 ‘루두 마갈루(Lu du Magalu)’는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가 약 600만명에 게시물당 예상 수입은 1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다. 미국에서는 스타트업 ‘브루드’가 개발한 가상 인간 ‘릴 미켈라’가 유명하다. 프라다·샤넬 등 유명 명품 모델로 활동했고, 연간 130억원 정도 벌어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가상 인간 ‘이마(IMMA)’가 인기를 끌고 있다. 2019년 일본 스타트업 ‘AWW’가 제작했는데, 가구업체 이케아가 지난 2020년 이마를 모델로 발탁해 화제가 됐다. 올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는 우크라이나 업체 ‘FFFACE.ME’가 개발한 가상 인간 ‘아스트라’가 전 세계에 전쟁의 참상을 알렸다.

가상 인간 시장이 성장한 배경에는 기술의 발전이 있다. 가상 인간이 최근 들어 주목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등장한 것은 20년도 훌쩍 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사이버 가수로 등장한 ‘아담’이 최초 가상 인간으로 불린다. 만화 캐릭터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키 178㎝·몸무게 68㎏에 조각 같은 남자 외모로 인기를 끌었다. 데뷔곡 ‘세상엔 없는 사랑’으로 음반 20만 장 이상을 팔았다. 하지만 금방 관심에서 멀어졌다. 아담이 군대에 갔다거나 바이러스에 걸려 죽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하지만 기술력 부족과 감당할 수 없는 제작 비용이 실제 이유였다. 아담의 경우 방송 출연이 예정돼 있으면 손으로 만화를 그리는 것과 같은 수작업이 필요했다. 당시 TV가요프로그램에 30초간 출연하려면 개발자 5~6명이 두 달 이상을 밤낮없이 달라붙어 작업해야 할 정도였다. 몇 분만 방송에 출연해도 1억원 넘는 돈이 들었다.

20여 년이 지나 관련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이런 문제는 대부분 해소됐다. 최근 등장한 가상 인간들은 피부의 질감이나 행동, 목소리 등이 인간과 차이가 거의 없다. 인간 얼굴 근육과 주름 움직임,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재현해 낼 수 있는 정도로 기술이 올라왔다. 제작 비용도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일부 스타트업 제작업체는 수백만원으로도 가상 인간을 만들어낸다. 가상 인간 제작 업체 클레온 관계자는 “대체로 500만원이면 가상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가상 인간이 실제 움직이도록 하는 데도 1분당 1만원이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제작 방식은 업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가상 인간의 얼굴에 실제 사람 몸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업계 관계자는 “광고 촬영 등을 위해 특정 옷을 입어야 하는데, 실제 사람에게 입히고 가상 인간의 얼굴을 연결할 때가 가장 자연스럽게 보인다”고 말했다. 이 경우 ‘가상 인간 얼굴 제작→실제 모델 촬영→얼굴과 촬영된 모델 합성’ 순으로 제작된다. 롯데홈쇼핑의 경우 루시 얼굴과 잘 어울리는 몸매를 가진 20대 후반의 여성 모델과 계약을 맺었다. 루시가 등장해야 할 때면 실제 모델 촬영을 마친 뒤 루시 얼굴과 모델의 몸을 연결한다.

◇낮은 대중성·호감도 극복은 숙제

한국에서 제작된 가상 인간들은 K팝과 K드라마 같은 문화 콘텐츠를 기반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 김진수 이사는 “기술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국가별로 큰 차이가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가상 인간에 어떤 콘텐츠를 담아낼 수 있느냐에 승부가 나게 돼 있다”며 “우리나라처럼 가상 인간들이 활동할 수 있는 드라마나 광고, 음악 등의 콘텐츠를 풍부하게 보유한 나라는 드물기 때문에 계속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넘어야 할 벽도 적지 않다. 우선 수익성이다. 수백만원으로도 가상 인간 하나를 탄생시킬 수 있지만, 3D 기술을 동원해 정교하게 만들어 내려면 수억원이 드는 경우도 있다. 국내 한 공공기관이 내놓은 가상 인간의 경우 약 2억원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가상 인간의 얼굴에 맞출 실제 모델 섭외하고 촬영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가상 인간으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 ‘이터니티’의 경우 멤버 1명당 4명 정도의 실제 모델이 투입된다. 말과 노래, 연기 등을 담당하는 모델이 각각 필요하기 때문이다. 롯데홈쇼핑 관계자는 “로시의 경우 많은 협찬이 들어오고 광고모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지만, 모델로 등장시킬 때마다 드는 비용 등을 고려하면 아직은 큰 수익을 내는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대중성 부족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가상 인간이 주로 젊은 층을 겨냥해 탄생하다 보니 고연령층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호감도를 더 끌어올려야 하는 숙제도 있다. 트렌드 미디어 캐릿이 15~26세 남녀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 가운데 8명은 가상 인간을 최소 1명이라도 알고 있는데, 호감을 느낀 적이 있다는 응답자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77%는 AI 기술이 신기해서 관심을 가진다고 답했다. 외모가 비슷비슷한 가상 인간들이 우후죽순처럼 시장에 쏟아져 나오다 보니 대중이 금방 질릴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 가상 인간 제작 업체 대표는 “신기함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익숙함과 자연스러움을 주지 못하면 1990년대 아담과 비슷한 운명을 맞을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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