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정의를 바로잡을 때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한겨레 2022. 8. 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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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형 과학의 언저리]"뜻밖의 재난을 당한다"는 이제 현실과 맞지 않는다. 전조나 경고를 놓쳤을 뿐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었던 사건들이 많다. "자연에 의한 재난은 피하기가 어렵다"는 예문도 재난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배치된다. 자연재난인 줄 알았던 것들 배경에 인간의 선택과 행위가 있었다는 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설치된 공공미술품 ‘세월호 기억의 벽’.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지난 14일 중국, 대만, 일본, 인도,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온 재난연구자, 예술가, 활동가, 학생들이 카이스트에 모였다. 세월호 유가족 몇분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시작해서 21일까지 진행되는 ‘재난학교’에 참석하는 이들이었다. 카이스트의 재난학자인 스콧 놀스 교수가 주관하는 재난학교는 “실제 재난이 벌어졌던 현장, 혹은 아직도 재난이 종결되지 않은 현장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공동체와 함께 재난을 새롭게 이해하고, 상호 간의 도움을 도모하고자 하는 배움의 장”이다. 올해 재난학교는 세월호와 제주4·3이라는 두 사건에 주목해 한국을 재난연구의 주요 현장으로 삼았다. 코로나19라는 재난을 함께 겪으며 떨어져 있던 연구자들이 모처럼 모여 한국의 재난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재난학교 참가자들은 안산과 제주 등 몇년 혹은 몇십년 전에 있었던 크나큰 비극의 현장을 찾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최근 한국 땅 곳곳은 조금 다른 종류의 재난 현장이었다. 재난학교가 시작되기 불과 며칠 전 폭우와 홍수로 집과 차가 잠기고 사람들이 숨졌다. 우리는 지금껏 실감하지 못했던 기후위기라는 궁극의 재난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반지하에 살던 장애인 가족의 죽음에서 재난의 불평등을 절감하기도 했다. 재난학교는 세월호의 안산과 4·3의 제주가 아니더라도 한국 어디서든 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폭우와 홍수도 재난이고, 세월호도 재난이고, 4·3도 재난이라면, 도대체 재난은 무엇이며 또 재난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재난에 대한 최근 기사나 칼럼을 찾아보려고 뉴스 검색창에 ‘재난’을 넣으니 그 목록이 너무 길어서 모두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이라는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요즘 일어나는 사건 중 다수가 재난이고 이 사회 어디든 재난 현장이 된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 규정하는 각종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은 이제 너무 자주 너무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번 재난학교가 추구하는 새로운 관점, 즉 자연과학, 공학,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학이 모두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재난학’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전체를 다루는 학문 분야가 될지도 모른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재난’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예문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재난의 시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뜻밖의 재난을 당한다”는 익숙한 문장은 이제 현실과 맞지 않는다. 전조나 경고를 놓쳤을 뿐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었던 사건들이 많다. “자연에 의한 재난은 피하기가 어렵다”는 예문도 재난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배치된다. 자연재난인 줄 알았던 것들의 배경에는 사실 인간의 집단적 선택과 행위가 있었다는 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재난을 당한 주민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예문은 그저 공허하게 들린다.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은 이런 형식적인 인사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재난의 양상이 달라지고 우리의 재난 경험도 달라지면서 이제 재난의 사전적 정의와 예문도 달라질 때가 됐다.

이 시대에 좀 더 적합한 재난의 정의는 재난 피해자들로부터 나올 수 있다. 재난학교 넷째 날 연사로 참여한 세월호 희생자 상준 엄마 강지은씨는 재난을 이렇게 설명했다. “재난은 갑작스럽게 발생하여 생명과 생활 터전에 심각한 손실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상준 엄마는 ‘외부의 도움 없이는’과 ‘누구에게나’에 색을 입혀 강조했다. 이에 따르면 재난의 핵심은 사건이 “뜻밖에” 발생한다는 예외성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에게나” 발생한다는 보편성에 있다. 또 우리가 재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피해 사실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회복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관계와 제도다.

재난의 정의를 수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재난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일이다. 상준 엄마가 발표에서 언급한 재난 피해자들의 “외상 후 성장”도 그들이 재난 상황에서 또 재난 이후에 겪은 모든 부당함을 시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재난학교 참가자들도 안산과 제주에서 바로 그 점을 확인했을 것이다. 재난의 정의를 바로잡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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