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도 태양도 없다".. 우상 숭배 저항한 항일투쟁 혁명가 김학철

김종목 기자 2022. 8. 1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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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1916~2001)의 대표작 <격정시대>(상·하)가 재출간됐다. 보리출판사가 수년에 걸쳐 내기로 한 ‘김학철 문학 전집’ 1·2권이다. 보도자료를 보면 “남에서는 사회주의 단체라는 이유로, 북에서는 김일성 독재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남과 북 모두에게 외면당한 조선의용대”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 여기’의 우상 숭배에서 다시 읽는 김학철

북한이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부각하고, 연안파를 숙청하면서 김학철의 ‘호가장 전투’는 잊혔다. 한국에선 1980~1990년대, 2000년대 초반 김학철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졌지만, 지속되지는 못했다. 저평가는 해방 이후 이승만, 김일성, 모택동(마오쩌둥)이라는 ‘우상’에 저항하고, ‘영웅’과 ‘태양’을 배격한 행보와도 무관하지 않다. 정치인 숭배와 우상화는 ‘지금 여기’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김학철 책과 사상은 다시 들여다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가 견지한 사상이 국제주의와 여성주의 등에 걸친 점도 새로 읽어낼 수 있다.

1945년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 석방 당시 김학철. 나가사키 형무소 당국은 1941년 김학철 압송 뒤 호가장 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다리 수술을 ‘비국민, 황국의 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1945년 2월 신임 의무과장 히로다 요쓰구마의 도움으로 방치된 다리를 절단했다. 보리출판사 제공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용동(현재 원산시 용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홍성걸인데 독립 투쟁에 나서며 이름을 바꿨다. 보성고보 재학 중 중국 상해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의용대에 들어갔다. 김학철은 1941년 12월 호가장 전투 때 다리에 총상을 당했다. 일본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수인번호 1454이다. 형무소 당국은 ‘비국민, 황국의 적’이라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했다. 1945년 2월에야 방치된 다리를 절단했다. 해방이 되고 감옥에서 나왔다.

그 누구든 개인숭배와 우상화 참지 못했다

김학철은 그 대상이 누구든 개인숭배와 우상화를 참지 못했다. 해방 뒤 서울 소공동 수산회관에 차린 공산당 서울시위원회를 찾았다가 박헌영을 두고 ‘암야(暗夜)의 등대’로 적은 표어를 보고 실망했다. 비슷한 시기 평양엔 ‘해방의 은인이신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적은 현수막이 내걸렸다.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은 김학철 말을 다음과 같이 옮겼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로서의 공산주의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놓고 ‘은인’으로 자처하다니!” 그가 “왜 하필이면 김일성대학입니까? ‘모택동대학’도 없고 ‘이승만대학’도 없고”라고 말한 일화도 적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무한(우한)에서 창립했다. 당시 촬영한 기념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양복 착용한 남성 뒤쪽 명찰이 보이는 이가 김학철이다. 보리출판사 제공

오창은은 논문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주의 문학의 철필(鐵筆)’에서 “그의 삶에 새겨진 감옥체험은 민중적 관점에서 ‘우상화에 대한 저항’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김학철 문학의 공간적 특징은 화로강과 태항산, 그리고 감옥(나가사키 형무소, 중국 추리구 감옥)으로 집약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개인숭배 사람을 맹목의 동물로 만들어

추리구 감옥에서 10년 수감된 건 1965년 탈고한 <20세기의 신화> 때문이다. 비판적 지식인을 우파나 제국주의 첩자로 몰아낸 중국의 반우파 투쟁을 고발하고, 모택동 1인 독재를 고발한 이 책은 “ ‘민중주의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개인숭배 비판의 관점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세기의 신화> 작중 인물인 임일평은 한 문학청년한테 “우리의 시가 단지 모택동 시대니 가슴 벅찬 새시대니 하는 따위의 소리만을 외쳐 가지구 과연 읽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까요?”라고 한마디 했다가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간다. “이반 데니소비치(소련 작가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주인공)도 여기 와 한 주일만 있어 보면 그전 시베리아의 수용소가 그리워서 회향병에 걸릴 것”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김학철을 체현한 심조광은 “모택동이를 하늘같이 우러릅니다. 누가 조금이라도 모택동이를 나삐 말할라치면 모두들 기가 나서 반박을 가합니다. 개인숭배란 이 지경(으로) 사람들을 맹목의 동물로 만들어놓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습관의 힘이란 이같이 뿌리가 깊은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김학철 혁명 여정 지도’. 전집 재출간 <격정시대>에 수록한 지도다. 보리출판사 제공

김학철은 모택동의 1인 독재를 ‘모교’로, 중국인을 ‘모교도’라고도 풍자했다. 당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풍자와 비판이었다. 김학철은 훗날 “‘언감생심 체어맨 마오를 반대하다니 내가 이거 미치잖았니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게 아닌가?’ 총살 당하는 광경이 자꾸 눈에 밟혔다”고 회고했다. 김학철은 모택동 등을 비판하면서 당시 소련을 또다른 이상향으로 삼으며 경도됐다는 지적도 받는다.

모택동, 김일성 우상에 차례로 도전

김일성에 대한 비판도 신랄하다. 심조광은 “김일성은 돼지 한 마리를 온새미로 삼키려고 노리고 모택동은 황소 한 마리를 통으로 삼키려고 골몰하며, 하나는 왕이 되고 싶어 밥맛을 모르고 하나는 황제가 되고 싶어 밤잠을 못 자는 것뿐”이라고도 했다. 김학철은 김일성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며 “김일성이의 위훈이라는 것에 관한 대목들은 99.99프로가 다 거짓말입니다. 단군의 신화가 아니면 H. G. 웰즈의 환상소설입니다”라고도 했다. 김학철의 비판엔 조선의용대 투쟁사를 한쪽도 못 되게 축소 서술한 북한 정권에 대한 반발도 녹아 있다. 김학철은 ‘노동신문’에서 일하던 1948년 김일성 비위를 거스르는 글(‘누가 건설을 파괴하는가’)을 썼다가 좌천당하기도 했다. 김학철은 1995년 “김씨 왕조의 붕괴 없이 통일을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가련하고 처량한 백주몽(白晝夢)”이라고 쓰기도 했다.

<격정시대>는 자전적 소설이다. 조선의용대 체험을 중점으로 서술한다. 1920~1930년대 격변과 원산부두노동자파업 등을 녹였다. 김학철이 허벅지 관통상을 당한 호가장 전투로 마무리한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일본인들도 다룬다. 극중 서선장이 ‘동지애’를 느낀 가지 와다루 부부는 반전(反戰) 작가로 박해를 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이들이다. “반전동맹이나 조선의용군이나 다 이 침략전쟁을 반대해 싸우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김학철이 중국 호가장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 압송된 뒤 갇힌 일본 나카사키 형무소 모습. 보리출판사 제공

‘원산부두 노동자 파업’도 적었다. 평전도 이 파업을 상술했다. 파업 때 안벽(岸壁)에 선복(船腹)을 붙이고 정박한 쓰루가마루 화물선 갑판 위에서 관전하던 일본 선원들은 “형제들 버텨라!” “파업 만세”라는 고함을 지르며 발들을 굴러댔다. 일본 기선의 선원들이 기적 소리로 응원했다. “일본인들은 원수가 아닌가”라는 소년 김학철의 의문은 훗날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한 집안의 이치”를 깨닫는 데로 이어진다.

일본인 노동자, 반전 지식인들과 연대 의식도

박용규는 논문 ‘동북아 20세기와의 대결 : 김학철의 민족해방서사’에서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면서도 민족적 정체성과 지향성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민족문학 개념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소중한 자산”이라고 평했다. 박용규는 <격정시대> 중 원산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동조한 일본인 노동자들 모습에 선장이가 충격 받는 모습에 더해 ‘조선의용군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갈 것인가 붉은기를 들고 나갈 것인가를 가지고 논의하는 장면’, ‘선장이가 동아일보 호외에 일본인 교수가 조선 사람을 숨겨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모습’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감격하는 장면’ ‘태항산에서 중국 팔로군들이 조선의용군을 환영하는 집회를 열고 선장이는 민족을 초월한 동지애를 느끼는 장면’ 등을 “국제주의적 시각으로 각성해가는 선장의 의식 변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로 꼽았다. 박용규는 “윤간당한 애인을 야멸차게 매도하는 선우군의 태도,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인과 관련된 일화 등은 (김학철이) 남성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여성 문제를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들”로 규정했다.

김학철은 1987년 발표한 ‘작가수업’에서 “(작가들은) 인류사회의 진보를 저해하는 어중이떠중이를 신랄하게 비웃고 매섭게 채찍질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존경한 인물 중 하나는 루쉰(1881~1936)이었다. 그는 “루쉰의 정신에다 홍명희의 표현수단을 배우면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생 좌우명은 “편안히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다.

김학철. 보리출판사 제공

보리출판사는 다음주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을 내놓는다. 보리출판사는 “굽히지 않는 저항 정신과 혁명적 낙관주의로 문학이란 무엇인지, 작가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이념 대립으로 우리에게 잊혀지게 되었다. 전집은 김학철 문학의 전체를 온전히 소개하는 작업이다. 민족의 정신사와 문학사에 하나의 이정표이자 영원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집을 펴낸다”고 알렸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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