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기업이 '반칙'하기 좋은 나라 / 곽정수

곽정수 2022. 8. 1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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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취임 100일을 맞아 연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소회와 국정운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법과 윤리를 위반한 임직원에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용을 베풀지 않겠습니다.”

삼성전자는 2012년 공정위 조사방해 사건으로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국기문란 행위”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건희 회장이 크게 진노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삼성전자는 휴대폰 가격을 부풀린 불공정거래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공정위 직원을 가로막은 뒤 컴퓨터 교체, 증거 삭제, 담당임원 도피 등의 불법을 버젓이 저질렀다. 기업들의 공정위 조사방해는 2011년 한해 동안만 무려 5건이나 발생했다. 해당 기업도 삼성·에스케이·엘지·씨제이 등 한국경제를 대표하는 재벌이었다. 공정위가 조사방해에 대해 형벌 조항을 신설하는 등 제재를 대폭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윤석열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를 명분으로 경제 형벌을 완화하기로 했다. 경제법의 과도한 형벌조항이 경영을 위축시킨다는 경제계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완화 검토 대상에는 조사방해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정위의 현장조사를 무력화시킬 우려가 있다”며 중단을 촉구했다. 이건희 회장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일부 경제 형벌조항의 경우 글로벌 스탠다드와 거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일례로 상당수 공정거래 분야 사건은 살인·절도 같은 형사사건과 달리 행위 외형만으로 위법성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 엄밀한 경제분석을 통해 경쟁제한성 등을 판단해야 한다. 선진국이 형사처벌보다 행정제재와 민사적 피해구제 중심으로 운영하는 이유다. 우리도 경성카르텔, 일감몰아주기 같은 총수일가 사익편취 등만 형벌조항을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행정제재나 민사적 피해구제 위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과도한 경제 형벌 완화는 ‘기업 봐주기’로 법치주의를 훼손한다. 공정한 시장질서를 해쳐서 국가경제에도 큰 해악이 될 수 있다. ‘재벌 봐주기’는 독과점 심화와 시장경쟁 약화로 이어져 양극화와 불평등 개선에도 역행한다. 더구나 한국 기업의 준법·윤리경영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결코 낫다고 할 수없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서양 속담이 있지만, 기업도 마찬가지다.

굳이 경제 형벌을 완화한다면 철저한 보완이 필요하다. 정부는 형벌을 행정제재로 전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행정재제의 법위반 억지력을 먼저 높여야 한다. 담합은 시장경제의 공적으로 불린다. 유럽은 담합에 대한 과징금 상한이 전세계 매출액의 10%로 높다. 미국은 형벌과 벌금을 동시에 부과한다. 벌금 상한도 담합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액의 두배 또는 부당이익의 두배로, 통상 매출액의 20%로 추산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과징금 상한이 전체 매출액이 아닌 담합 관련 매출액의 20%에 불과하다. 그나마 기업의 부담능력을 고려해 실제 부과율은 5%를 넘지 못한다. 공정위 제재에 ‘솜방망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붙는 이유다.

민사적 피해구제의 실효성도 높여야 한다. 미국이 민사적 피해구제가 활발한 것은 관련 법제도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소송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피해자도 배상받을 수 있는 집단소송제, 소송 당사자가 가진 증거와 서류를 상호 공개하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이런 제도들이 아예 없거나, 극히 제한적으로 도입돼 있다.

경제단체들은 기업은 물론 기업인에 대한 형벌도 과하다고 주장한다. 기업과 기업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전근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평균 3~4%의 지분만 가진 총수일가를 기업의 주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법을 위반한 경영진은 무능한 경영진과 마찬가지로 교체하는 게 마땅하다. 그래야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

공정경제를 위해 오히려 형벌을 더 강화할 부분도 있다. 미국은 1990년대 이후 카르텔과 관련한 기업과 개인에 대한 법집행을 대폭 강화했다. 벌금의 상한을 올리고, 개인에 대한 징역형과 벌금형의 상한도 높였다. 한국 대기업도 잇달아 수억달러의 막대한 벌금과 함께 인신구속형이 부과됐다. 관행으로 여겨지던 담합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정작 한국은 공정위의 검찰고발이 늘고 있지만 실제 징역형은 거의 없고, 담합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전경련은 과도한 형벌의 예로 분식회계 처벌을 꼽았다. ‘무기 또는 징역 5년 이상’ 규정이 너무 무겁다는 것이다. 분식회계는 자본시장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로 엄격히 제재하는 게 글로벌 스탠다드이다. 미국 7대 기업으로 불렸던 엔론은 2001년 분식회계가 드러나면서 파산이라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최고경영자인 제프리 스킬링은 징역 14년을 선고받았고, 부회장인 존 클리포드 백스터는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세계적 회계감사법인인 아서 앤더슨은 분식회계를 눈감아줬다가 공중분해 됐다.

윤 대통령은 공정과 상식을 약속했다. 하지만 기업에는 형벌 완화를 추진하면서, 노동계를 향해서는 불법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집행을 강조한다. 명백히 기울어진 공정이다.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은 2016년 이후 국정농단세력에 대한 뇌물공여,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 삼성전자서비스 노조파괴 등으로 검찰수사와 재판을 잇달아 받았다. 무리한 경영승계와 전근대적인 무노조경영을 고집하다가 화를 자초했다. 하지만 ‘이재용 리스크’가 아니라 과도한 법적용에 따른 ‘사법 리스크’라는 견강부회식 주장이 여전하다. 이 부회장이 정말 과잉 수사와 형벌의 희생자라면, 당시 수사의 총책임자였던 윤 대통령부터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경제계의 과잉 형벌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윤석열의 자기 얼굴에 침뱉기’가 될 수 있다.

법과 제도는 한번 바뀌면 그 영향이 오랫동안 누적해서 나타난다. 경제 형벌 완화에는 법개정이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윤석열의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가 자칫 ‘기업이 반칙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로 변질되지 않도록.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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