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은 주몽의 아들인가? (2)

임기환 2022. 8. 18.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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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56] 유리왕이 부여에서 고구려로 남하하여 아버지 주몽을 만나 태자가 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가 유리전승이다. 이 전승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즉위년과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 수록되어 있다. 지난 회에 이 두 전승을 소개하면서 비교해보시라고 말씀드렸다. 전체적으로 거의 같은 내용이라 그리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좀 더 구체적인 면에서 설화적 분위기가 좀 더 두드러진 게 구삼국사의 전승임은 충분히 느끼셨을 게다.

두 전승 사이에 몇 가지 차이점을 짚어보자. 첫째 주몽의 부인이자 유리의 어머니가 '예씨'라는 내용이 <고구려본기>에만 기록되고 있다. 물론 <동명왕편>에 인용된 내용이 <구삼국사> 전체 문장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기록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씨'라는 정보는 나름 중요하기 때문에 <구삼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면 이규보가 이를 굳이 빼놓을 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이규보는 <고구려본기>를 읽었기 때문에 '예씨'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유리의 어머니가 '예씨'라는 기록은 이전에 살펴본 백제 비류시조 전승에도 보이고 있다. 전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본기의 '예씨'라는 기사는 백제본기 비류시조 전승을 참고하여 정리한 결과이다. 어쨌든 유리전승에는 어머니 성씨가 '예씨'라고 기록된 계통과 기록이 없는 계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어머니가 유리에게 아버지 주몽을 소개하면서 <고구려본기>에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구삼국사>는 "네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말한다. 주몽의 신성성에 대한 표현에서 두 기사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구삼국사>의 전승 대목이 주몽전승과의 관련성도 더 깊고, 동시에 신화적 색채 또한 훨씬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비문>처럼 '천제의 아들'이 아니라 '천제의 손자'라는 표현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를 의식한 표현임은 전에 언급한 바 있으니, 상기해 보시기 바란다.

셋째, 주몽은 물론 유리의 신성성을 강조함은 <구삼국사>에서 주몽이 유리에게 마지막 테스트로서 스스로 신성한 재주를 보이라고 요구하는 대목에서 가장 고조된다. 유리는 "몸을 날려 솟아올라 창으로 비치는 햇빛을 타는 신성한 이적"을 펼쳐서 주몽의 혈통임을 인정받는다.

사실 유리는 주몽을 만나기 전에 주몽의 혈통다운 능력을 증명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주몽이 아내에게 전한 과제는 반으로 잘린 단검을 찾기 위한 수수께끼 풀이였다. <고구려본기>에는 그 수수께끼를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七稜石上松下]"로 기록하였고, <구삼국사>에는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의 소나무[七嶺七谷石上之松]"라고 하였다. <고구려본기> 내용이 다소 싱겁다면, <구삼국사> 내용이 훨씬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답다고 할 수 있다.

수수께끼 풀이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영웅이 통과해야 할 일종의 관문으로 등장하곤 한다. 예컨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은 오이디푸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수수께끼 풀이는 하나의 난관을 돌파하면서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유리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함으로써 아버지 주몽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따지고 보면 <구삼국사>에서 유리가 화살을 쏘아 물동이에 구멍을 내고 다시 화살로 그 구멍을 메꾸는 대목은 유리의 활 쏘는 재능이 아버지 주몽으로부터 물려받았음을 암시한다. 이점에서도 <구삼국사>의 전승이 전체적으로 <고구려본기>의 전승보다 유리가 아버지 주몽을 잇는 신성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는 면에 보다 충실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즉위년조
앞서 비교해 본 것처럼 두 전승이 전체적으로 비슷한 내용이지만, <구삼국사>의 유리전승이 주몽과의 관련성이 더 두드러지고, 또 유리의 신성한 능력을 강조하는 내러티브가 훨씬 생동감이 있고 풍부하다는 점에서 두 전승 중 후대에 성립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유리전승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은 오히려 <고구려본기>의 유리전승 쪽이다. <구삼국사>가 <삼국사기> 보다 먼저 만들어진 역사서이지만, 수록된 전승은 이와는 다른 문제이다.

그런데 두 전승 내용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고구려본기>에만 보이는 내용으로 유리가 부여를 떠날 때,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동행했다는 점이다. 이 대목은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세 사람과 동행했다는 점과 상통한다. 이들 3인의 동행은 단지 세 사람만이 아니라, 세 사람으로 대표되는 일정한 세력집단을 거느렸다고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본다.

즉 유리도 주몽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리가 단지 주몽의 아들로서 그 뒤를 잇기 위해 남하했다기보다는 유리 역시 주몽과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남하하는 하나의 세력집단이며, 그렇다면 주몽과는 다른 건국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주몽왕 재위 19년 4월에 유리가 부여에서 주몽을 찾아와 태자로 삼은 뒤 곧이어 9월에 주몽이 승하하여 유리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주몽왕과 유리왕의 계승 과정이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몽왕의 죽음을 <구삼국사>에서는 "왕이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추모]왕이 왕위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중략)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늘에 올라갔다는 신성한 측면만이 아니라, 주몽왕이 스스로 왕위를 그만둔 듯한 표현이 눈길을 끈다. 즉 주몽에서 유리에게로 왕위 계승이 부자연스러워서 어찌 보면 주몽왕과 유리왕의 관계를 의제적인 부자 관계로 만들어 놓은 듯한 분위기이다.

사실 유리전승의 내용을 보면, 주몽전승과 통하는 면도 없지 않다. 주몽이 홀어머니 유화부인 아래서 자랐는데, 유리 역시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예씨 아래에서 자란 면과 통한다. 유리의 활쏘기 재능을 주몽의 혈통이라는 점에서 보지 않고 유리 독자의 재능으로 본다면, 이 역시 주몽전승의 주인공 모습과 통한다. 또 부여로부터 고구려지역으로 남하하였다는 점, 그리고 부여를 탈출할 때 3인과 동행한다는 점도 서로 통하고 있다.

다만 주몽전승의 핵심 모티브인 엄시수를 건널 때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를 만드는 장면이 유리전승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큰 차이이다. 대신 유리전승에는 부러진 칼을 찾는 대목이 핵심 모티브이다. 즉 핵심 모티브의 면에서는 두 전승이 전혀 다르다. 다만 유리전승은 신화적인 면이 탈색되어 있고, 현실에서 있을 법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몽전승보다는 후대적인 성격이 농후하다.

유리전승이 주몽전승과 달리 신화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지만, 나름 주몽전승과 통하는 내용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면에서 독자적인 시조 전승으로 볼 여지가 있다. 물론 유리전승만으로는 유리가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 또 다른 시조라고 볼 근거는 그리 충분치 않다. 그러나 다른 여러 자료를 통해 유리의 존재를 다르게 볼 가능성이 크다. 다음 회에서는 그 점을 좀 더 짚어보고자 한다.

이미 필자는 고구려 주몽은 실재했던 인물이며, 이를 기준으로 볼 때 백제 시조인 온조와 비류가 주몽의 아들이 아님을 밝혔다. 이번에는 유리왕도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전승에 등장하는 주몽의 세 아들의 존재를 모두 부정한 셈이다.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흥미롭고 극적인 사건이 풍부한 주몽 관련 내러티브를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사료비판하였으니, 우리 고대사의 첫머리를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게 만든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설화는 어디까지나 설화이지 역사는 아니다. 설화 해석에 사료비판이 더욱 요구되는 이유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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