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돌봄

박대순 지구촌사랑교회 담임목사·시인 입력 2022. 8. 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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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음에 이른 자를 발견하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

자신은 여행 중인 상황이라 여관 주인에게 강도 만난 자가 머물 동안의 경비와 치료에 필요한 돈을 건네며 뒷일을 부탁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강도 만난 자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꿀벌처럼 살면 안 될까.

그리고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해버린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을 내려놓고 이 시대에 강도 만나 자와 함께 살면 안 될까를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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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순 지구촌사랑교회 담임목사·시인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음에 이른 자를 발견하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급한 대로 응급조치를 하고 가까운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자신은 여행 중인 상황이라 여관 주인에게 강도 만난 자가 머물 동안의 경비와 치료에 필요한 돈을 건네며 뒷일을 부탁했다. 그리고 경비가 부족하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넘어 사랑의 배려로 돌봄을 실천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는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또 한 부류는 이웃에게 불편을 끼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한 부류는 이웃을 제 몸처럼 돌아보는 사람들이다.

특히 자신만을 잘 돌보는 사람은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사리 분별이 분명한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이웃에게 불편을 끼치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고립을 시킨다. 왜냐하면 자신은 바른 판단과 행동을 한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들은 이기주의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이반 크르일로프는 18세기의 탁월한 우화 작가다. 러시아 문학의 자존심으로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솝이나 라퐁텐에 비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우화는 교훈과 풍자적인 내용을 동식물 등에 빗대어 엮은 이야기다. 그 속에는 어려움이나 슬픔을 헤쳐나가기 위한 지혜가 숨어 있다. 크르일로프 우화에 대한 비평가의 이야기 중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사고와 개념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 가는지, 또 사고의 구조와 기능은 어떠한 건지, 그 사고 과정이 우리의 언어와 무슨 관련을 맺고 있으며 맺어 가는지를 시적인 언어와 상상력으로 탐구해 간다고 했다.

특히 이반 크르일로프의 '독수리와 꿀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꽃밭 주위에서 날개를 열심히 움직이며 일하는 꿀벌을 보고 독수리가 비웃으며 말을 했다. "누가 열심히 일하는지 게으른지 표도 안 나는데 무엇 하러 그렇게 부지런 떠니". 그러자 꿀벌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라면 날개 달린 짐승도 누구나 겁을 내고 장난꾸러기 목동조차 무서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은 위대한 분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모르고 계시는군요. 당신은 당신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일하지요".

21세기인 요즈음이 그렇다. 이웃이 강도를 만나고 이웃이 위기를 만난다고 나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독수리처럼 나만 부족함이 없으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레위인과 제사장은 한 것이 아닐까.

오늘도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꿀벌 같은 사마리아 사람을 현실 속에서는 거의 만날 수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강도 만난 자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꿀벌처럼 살면 안 될까. 그리고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해버린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을 내려놓고 이 시대에 강도 만나 자와 함께 살면 안 될까를 말씀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의 행위는 사랑의 돌봄이라는 것이다. 대전에도 작은 선한 사마리아인 현복환씨는 아이들을 위해 박봉을 털어 이곳저곳에 헌신한다고 한다. 우리도 꼭 필요한 사람을 기꺼이 안아주고 돌보고 배려해 주는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실천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세상은 점점 더 많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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