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강원 노포 탐방] 13. '희열네 방앗간' 양구떡방앗간

이동명 2022. 8. 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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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과 동고동락 60년 추억 담긴 방앗간
부부 1959년 생계 위해 오픈
국수공장·방앗간 함께 운영
장마철 비바람에 간판 날아가
몇 번 반복 후 간판 없이 지내다
마을서 '희열네 방앗간'으로 불려
첫째 아들인 현재 대표 물려받아
절편·가래떡·시루떡·참기름 등
1980년대 품목 변함없이 유지
"공무직 아들에 물려주는 것 목표"

방앗간은 주민들에게 특별한 공간이다. 명절이나 잔칫날 같은 특별한 날이면 방앗간에 들러 떡을 한다. 맡겨놓은 떡이 완성될 동안 둘러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손님들로 방앗간은 어느새 사랑방이 된다. 6·25 이후 수복된 양구지역에서 60년 넘은 세월을 주민들과 동고동락한 방앗간이 있다. 바로 ‘양구떡방앗간’이다. 번듯한 이름을 두고 사람들은 이곳을 ‘희열네 방앗간’이라 부른다.

▲ 김상규 대표가 떡을 제조하기 위해 쌀가루를 만들고 있다.

모두가 없이 살던 시절의 ‘마당발’

‘희열네 방앗간’이 문을 연 것은 1959년 쯤이다. 1937년생인 김희열(2010년 작고)·장옥희 부부는 ‘먹고 살기 위해’ 방앗간을 열었다.

원래 양구제분소로 허가를 냈다. 그러다 먹고 살기 힘든 시기, 방앗간을 하면서 국수공장도 했다. 장옥희 씨는 “재주가 없었기에 고생스러운 일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수복 후 몇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양구읍내에 위치한 방앗간의 주변에는 솜틀집, 천막집, 여관, 담뱃가게, 뱀탕집, 정미소, 두부공장 등이 있었고, 대장간, 잡화점, 사진관도 위치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장(5일장)이 섰다. 당시 양구지역은 쌀농사를 지었음에도 쌀떡보다는 옥시기(옥수수)떡과 좁쌀떡을 많이 했다. 나무를 때서 보일러를 덥혀 김으로 떡을 하다보니 일이 더뎠다. 힘들고 피곤한 일이었다.

방앗간에 들어오면 슬레이트 지붕에 불을 지피는 과정에서 생긴 까만 그을음이 천장을 덮었다. 그땐 방앗간이면 원래 새카만 줄 알았다.

▲ 사진은 양구떡방앗간 외부 모습.

겨울이면 방앗간은 추웠다. 그래서 잠깐 일하고 방에 들어오길 반복했다. 시멘트 바닥이 아닌 맨바닥은 살짝 얼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그래도 나중에는 적응이 돼 좀 나아지는 듯 싶기도 했다.

남편 김희열 씨는 집안일보다 바깥일을 더 열심히 했다. 군청 직원이 부르면 나가서 언제 들어올지 알 수가 없었다. 방앗간일을 도맡아하다시피 한 장옥희 씨는 “하도 물건을 드는 일을 많이 해서 허리가 굽을 정도였다”며 “한 번 시작을 했으니 안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양구떡방앗간이 ‘희열네 방앗간’이 된 것은 비바람 때문이었다.

부부의 첫째 아들인 김상규 방앗간 대표는 “옛날에는 다 함석간판을 했었는데, 함석에다 붓으로 글씨를 써가지고 간판을 만들어 지붕 위에다 올려놓고 돌 같은 걸로 고정시켜놨었다”며 “비바람이 치는 여름 장마철에 간판이 휘질랑 날아가고, 다시 새 간판을 설치하고, 이렇게 몇 번 반복되니까 아버지(김희열 씨)가 그 다음 간판을 안 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희열네 방앗간’이라고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 1967년 양구읍 전경.

어느날 김희열 씨가 한 농촌에서 아줌마를 양구읍내까지 차로 태워다 주는 호의를 베풀면서 “어디 가시냐”고 물었다. 그 아줌마는 “희열네 방앗간으로 간다”고 했다. 김희열 씨는 “내가 희열이다”라고 했고, 둘은 크게 웃었다. 어느덧 전화 교환원들도 ‘희열네 방앗간’이라고 하면 알아들을 정도가 됐다.

김희열 씨는 마당발이었다. 방앗간을 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면소를 같이 하면서 국수도 만들어 팔았는데,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에 국수는 월명리, 상무룡리 등 곳곳에 팔렸다. 주로 외상장사였다. ‘가을걷이’로 받기도 했지만 못 받는 경우도 많았다.

부부의 둘째 아들인 김창현(양구군청 경제건설국장) 씨는 “손님이 ‘나중에 갖다줄게 ’라고 해도 정작 나중에 달라고 할 수 없고 해서 금전출납부(외상장부)가 10권 넘게 쌓여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김희열 씨는 상무룡리를 운행하는 ‘통통배’를 들여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처음에 상무룡리 사람들은 노 젓는 배를 이용해 파로호를 건너 양구로 나왔다. 김희열 씨는 군청과 협상해 노를 젓지 않아도 되는 배를 동네에 희사했다. 또 청년회장을 하면서 읍내에 은행나무 가로수를 심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 심은 은행나무가 드문드문 남아있다. 그렇게 그는 지역의 궂은 일을 도맡아서 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양구문화원장을 하면서 ‘양구군지’를 처음 만드는데도 관여했다.

▲ 김상규 대표가 떡을 하기 위해 쌀을 불리고 있다.

변해가는 세상, ‘떳떳함’은 힘이 세다

‘희열네 방앗간’에서는 현재 김상규(64) 대표가 가족들과 함께 씩씩하게 떡을 만들고 기름을 짜고 고춧가루 등을 빻는다. 읍내에서 가전대리점을 하던 김 대표는 IMF의 시기를 지나며 대리점을 접게 됐는데, 2010년 부친이 별세함에 따라 방앗간을 물려받아 운영하게 됐다. 그렇게 11년째 방앗간을 운영 중이다. 부친은 돈 욕심 없고 마음이 모질지 못해 주로 퍼주는 걸 좋아했으므로 재산은 모으지 못하고 1980년대에 현재 방앗간 자리의 건물 하나를 지은 게 전부였다.


장옥희 씨 부부의 3남 1녀 자녀들은 모두 양구를 떠나지 않았다. 장남은 방앗간을 운영하고, 차남은 군청 국장이며, 삼남(김국현)은 새마을운동 양구군지회 사무국장이다. 장녀도 양구에서 자영업을 한다.

▲ 방앗간 내부 모습

절편, 가래떡, 시루떡, 돌떡, 잔치떡…. 들기름, 참기름, 그리고 고춧가루까지. 방앗간에서 취급하는 품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기름을 짜기 위해 예전에는 ‘잣기’를 활용해 힘주어 눌렀지만 요즘 원터치기계가 처리한다. 고춧가루 기계는 전자동시설이 타산이 맞지 않아 아직 반자동시설이 가동되고 있다.

김상규 대표는 “부친의 영향으로 단골이 많지만, 이제 옛 세대는 가고 요즘은 방앗간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명절이면 떡을 하기 위한 ‘다라이’가 수십미터를 줄 섰지만 현재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왁자지껄하던 인파도 이젠 없다.

▲ ‘희열네 방앗간’으로 불리는 양구떡방앗간은 1959년 쯤 문을 열어 60여년의 세월을 지나며 주민들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흑백사진의 뒤쪽으로 1970년대의 방앗간 일부와 당시의 양구읍내 거리 모습이 보인다.

김 대표의 목표는 기운이 남아있을 때까지 방앗간을 운영하다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강원도청에서 공직생활하는 큰아들(김대선)이 퇴직하면 방앗간을 잘 경영하고 더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장옥희 씨는 “예전에는 모두가 없이 살았고 너나할 것 없이 힘들었다”며 “고생한 기억이 많아서 부끄럽다”고 했다.

김창현 씨는 “아버님이 방앗간을 해서 번 돈으로 땅을 사서 물려줬으며 자식들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겠지만 대신 지역에서 많이 베풀고 좋은 일을 많이 하시면서 자식들이 양구지역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셨다”며 “부모님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동명 ld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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