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905년 멕시코 이민사기.. 노예가 된 조선동포 수난사

2022. 8. 1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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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누군들 떠나고 싶어 갔으랴.

하루 3시간만 품을 팔면 3년 안에 부자가 되는 '하와이'로 이민을 시켜 준다는 일본 회사의 꼬임에 빠져 정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그 머나먼 멕시코에 도착해 어떤 농장에 노예로 팔려 온 것을 비로소 안 동포들이 목을 놓고 땅을 치며 한 말이, "이것이 국가의 죄냐? 사회의 죄냐? 또는 나의 죄냐? 그렇지 않으면 운명(運命)이냐?"라고 했다고 한다.

그들을 멕시코까지 노예로 가야만 하게 했던 것은 누구의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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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하루 3시간 품만 팔면 3년 안에 부자 된다는 감언이설 고역(苦役)·학대 생지옥, 13시간 혹독한 노동 견뎌야 신조선 건설 위해 300명 군대로 과테말라 혁명도 지원

조국을 누군들 떠나고 싶어 갔으랴. 어느 땅엔들 가고 싶어 떠났으랴. 1905년 힘겨운 항해 끝에 도착한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에덴동산'이 아니었다. 처음에 광고되었던 것과 달리 그들은 모두 농장에 노예로 팔려나갔다. 100년 전 신문 속에서 노예가 된 그들의 슬픈 이야기를 찾아보자.

1909년 7월 21일자 신한민보 기사다. "우리의 동포 천여명을 묵서가로 이민할 때에 계약하기를, 4년 기한이 차서 해고할 때에는 저축한 것 외에 1인당 100원(멕시코화)씩 주겠다 하였고, 분명히 그 때 모집광고에까지 게재하였는데 지금의 각 농주(農主; 농장주)는 계약을 위배하여...(중략)...멕시코 도성에 와서 고등재판소에 기소하기로 작정하고 율사(律師)를 고빙(雇聘; 모셔옴)하였는데, 그 비용은 멕시코에 있는 동포의 형세(形勢)로는 졸지에 변통할 수 없는 고로, 국민회 북미총회에 대하여 차관을 청한지라 총회에서는 우선 미화 200원에 대하여 7월 15일에 전신환으로 보냈다더라."

살기 힘든 조선을 떠나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떠난 이민은 결국 노예로 전락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부농이 될 것이란 꿈은 처참히 깨졌다. 1922년 8월 5일부터 4번에 걸쳐 동아일보에는 멕시코 동포에 대한 슬픈 이야기가 실린다.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따라가 본다.

"재작년 5월에 고국을 떠나 상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고 수에즈 운하를 지나 다시 파리를 거쳐 북아메리카 묵서가에 가서 오랫동안 유학하다가, 지난 26일에 경성에 들어온 황해도 진남포 출신의 김순민(金淳民)씨에게서 멕시코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사정을 들은 즉, 지금 멕시코에는 600여명의 동포가 있는데 그들은 지금부터 18년 전에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소위 개발회사에서 사시장춘(四時長春) 꽃이 피고 씨만 뿌리면 백곡(百穀)이 저절로 풍성하고 하루 3시간만 품을 팔면 3년 안에 부자가 되는 '하와이'로 이민을 시켜 준다는 그 회사의 꼬임에 빠져 마침내 멕시코에 있는 어떤 농장에 노예로 간 동포들이다. 그때 개발회사에서는 우리 동포 1030명을 모집하여 그들을 '하와이'로 이민시켜 준다 하고 4년 계약 하에 몇십만원의 금전을 받은 후 멕시코에 있는 그 농장에 노예로 팔아먹은 것이다...(중략)...자기가 노예로 팔려 온 것을 비로소 안 동포들은 목을 놓고 땅을 치며 '이것이 국가의 죄냐? 사회의 죄냐? 또는 나의 죄냐? 그렇지 않으면 운명(運命)이냐?'하고 울고불고 하기를 마지 아니 하였다 한다. 울다가 자살한 동포도 10여명에 달하였으며, 또는 운다고 농장 주인에게 매를 맞고 구류를 당하기는 매일 계속하는 일과(日課)이었다." (1922년 8월 5일자 동아일보)

"산 설고 물 설은 묵서가 유카탄 반도에서 매일 매를 맞아가며 우마(牛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노예의 생활을 하며 모든 것을 저주하고 모든 것을 비관하는 동포들은 병에 걸려 무참히 죽은 이가 실로 적지 아니 하다 하며, 그리하고 농장주인과 대항하여 '나는 노예가 아닌데 왜 이다지 나를 학대하느냐'하고 말썽을 부리다가 필경은 농장 주인에게 매를 맞아 원통한 혼백(魂魄)이 된 동포도 2~3명에 달한다 한다...(중략)...4년의 긴 세월이 꿈속 같이 지나가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1천여명의 남녀 동포는 자유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 하리요! 그네들의 손에는 돈 한 푼이 없으며 그네들의 앞에는 별다른 방책이 없었다. 이리하여 다시 그곳에서 매일 몇 시간씩 일을 하여 얼마 아니 되는 수입으로 그날그날의 가련한 생명을 유지하였다 한다." (1922년 8월 6일자 동아일보)

"멕시코 땅을 밟은 지 8~9년이 됨에 동포들은 여러 가지로 의논하여 학교까지 세우고, 매년 춘추(春秋)로 대운동회를 개최하여 멕시코 사람들에게 대단히 칭찬을 받았다 하며, 다소간 저금을 한 동포들은 멕시코 서울로 이주한 이도 적지 아니 하였으며 또는 미국으로 건너 간 동포들도 10여명에 달하였다 한다...(중략)...지금으로부터 9년 전에 이근영(李根英)이라는 이가 동포 300명을 거느리고 멕시코 남쪽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과테마라' 라는 나라의 혁명당원과 결탁해 가지고, 그 나라를 정복하여 신조선(新朝鮮)을 건설하고자 출정한 용감한 조선 군대는 과테마라 북방으로 침입하여 연전연승(連戰連勝) 도처마다 조선 사람의 용감을 나타냈으나, 원래 300명에 불과한 적은 군대라 30~40명의 동포가 살해를 당한 후 그만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다 한다. 그러나 이 과테마라 출정은 아직도 멕시코 사람들이 '조선 사람은 매우 용감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이야기의 재료라고 한다." (1922년 8월 7일자 동아일보)

"멕시코로 간 동포들 중에도 멕시코 서울로 가서 혹은 시계포 혹은 잡화상을 하는 이가 적지 아니 하며, 또는 공부에 뜻을 두고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도 적지 아니 하나 유카탄 반도의 참혹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현재에도 400여명의 동포가 그 곳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1000여명의 동포 중에서 200여명의 동포는 작년 봄에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쿠바로 이주하였으며...(중략)...이와 같이 고국을 떠나 18년을 해외에 표박하는 동포들은 아직도 시원한 세상을 보지 못하고 고생과 눈물의 생활을 계속 하는 중이라 한 즉, 아! 그들의 자취가 고국의 산천을 밟을 때가 언제나 오려는지!" (1922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하루 3시간만 품을 팔면 3년 안에 부자가 되는 '하와이'로 이민을 시켜 준다는 일본 회사의 꼬임에 빠져 정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그 머나먼 멕시코에 도착해 어떤 농장에 노예로 팔려 온 것을 비로소 안 동포들이 목을 놓고 땅을 치며 한 말이, "이것이 국가의 죄냐? 사회의 죄냐? 또는 나의 죄냐? 그렇지 않으면 운명(運命)이냐?"라고 했다고 한다.

그들을 멕시코까지 노예로 가야만 하게 했던 것은 누구의 죄인가. 그들을 이 땅에서 내몬 것은 과연 누구의 죄일까. 그러한 일들이 1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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