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직 하청노동자도 현대차가 직고용해야"..법원, 제조업 전산직 불법파견 첫 인정

박용필 기자 2022. 8. 17.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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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 입구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전산장비를 유지·보수하는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을 현대차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법원은 그동안 제조업의 비생산직군에서는 연구·개발 업무를 제외하고는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청업체에 속해 있더라도 현대차가 전산장비직 노동자들을 사실상 지휘·감독하고 있기 때문에 파견법에 따른 직접 고용 의무가 있다는 게 판결 취지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재판장 정현석)는 지난 12일 현대차 남양연구소 하청업체 소속 전산직 직원 A씨 등 11명이 현대차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고 17일 밝혔다.

A씨 등은 2001~2012년 현대차 하청업체에 입사했다. 이 하청업체는 남양연구소의 전산장비를 유지·보수하는 업무를 위탁받아 수행하는 도급계약을 현대차와 맺었다. A씨 등이 속한 하청업체는 수차례 바뀌었지만 이들은 남양연구소에 상주하며 비슷한 일을 계속했다. 이들은 “2년 넘게 현대차의 구체적인 지휘·감독 아래 근로를 제공했다”며 2020년 6월 현대차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다.

쟁점은 현대차와 하청업체 간의 계약이 업무자체를 위탁하는 ‘도급 계약’인지, 아니면 업무를 위해 노무를 제공하는 ‘파견’인지 여부였다. ‘파견’일 경우 현대차는 A씨 등을 직접 고용해야 할 의무를 진다. 파견법은 파견기간 2년을 경과한 노동자를 원청이 직접 고용하도록 규정한다.

계약의 형식은 ‘도급’이었지만 재판부는 ‘파견’으로 판단했다. “파견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파견인지는 계약의 명칭이나 형식이 아닌 ‘사용의 실질’을 기준으로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현대차의 결정·지시에 따라 A씨 등이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봤다. 현대차는 업무용 사내 전산시스템이나 자사 소속 총무팀 직원들을 통해 유지·보수 대상과 우선순위 정보를 전달했고, 언제든지 대상과 우선순위를 조정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A씨 등은 연구원들의 e메일이나 전화 등을 통한 지원 요청에도 응해야 했고, 실시간으로 고객 만족도 평가도 받았다. 하청업체가 독자적으로 파견 노동자의 수를 조정할 수 없었고, 근태 시간도 연구소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야 했다.

재판부는 업무가 ‘유지·보수’에 한정되지도 않았고, 원청 직원의 업무와도 구별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도급관계에서 허용되는 방식과 정도를 넘어 근로자파견관계에 이르렀다면 도급인(현대차)은 책임과 조치를 다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다만 “근로계약의 실질은 협력업체별로 다를 수 있어 전산장비 유지·보수 업무를 위탁했더라도 즉시 근로자파견관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A씨 등을 대리한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제조업 사업장의 전산직(하청) 노동자에 대해서 불법 파견을 인정한 첫 사례”라며 “경리나 전산직 등은 도급계약이 필요한 업무로 간주되곤 하는데, 이번 판결은 실질적인 근로관계를 따져 근로자파견관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했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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