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100일, 트럼프의 100일..닮아도 너무 닮았다

한겨레 2022. 8. 1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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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칼럼][박찬수 칼럼]
17일 오전 서울시 동작구의 한 음식점 TV에서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 방송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박찬수 | 대기자

잘 알려져 있듯이 ‘대통령 취임 100일’이 중요해진 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부터다. 1933년 3월4일 대공황의 와중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의회에 특별회기를 요청해 100일 남짓한 기간 동안 뉴딜 정책의 기초가 되는 73건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실업자를 구제하는 기구를 설립하고(연방긴급구호청 법안), 뉴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테네시강 개발사업 법안을 이때 만들었다.

루스벨트는 또 국민의 열정을 최대한 이끌어내서 국정운영의 동력으로 삼았다. 취임 여드레만에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라디오연설, 이른바 ‘노변정담’(Fireside chats)을 시작했다. 미국 성인의 절반 이상이 이 연설을 들었다. 전무후무한 루스벨트의 대통령 4선 기록은 취임 100일만에 주춧돌이 놓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루스벨트의 놀라운 성취는 이후 모든 대통령의 모델이 됐다. 국민의 기대와 열기가 충만하고, 언론은 적대적이지 않으며, 대통령의 의회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높은 집권 초기는 핵심 어젠다를 실현하는 데 더없이 좋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임 100일’을 모든 대통령이 달가워한 것은 아니다. 2017년 4월28일 취임 100일을 맞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100일은 잘못된 기준이다. 하지만 과거에 누구도 우리만큼 100일 동안 일을 하진 못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역대 최고의 100일을 보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뉴욕타임스>는 여러 항목에서 트럼프의 100일은 ‘최악’이라고 평가했다. 주요 법안의 입법에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행정부의 고위직 임명은 근래 어느 정부보다 더디게 이뤄지고 있으며, 외교정책은 명확하지 않고, 취임 직후부터 ‘러시아 스캔들’이라는 정치적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게 그런 평가의 이유였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는 취임 100일간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 대통령 행정명령을 32건이나 내렸다. 무슬림의 미국입국 금지처럼 첨예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거나 위헌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 수두룩했다.

지금 취임 100일을 맞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이런 지표를 그대로 적용해도, 평가는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우선 경제 위기상황임에도 이를 타개할 대통령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입법이 국회에서 이뤄진 건 거의 없다. 그 책임을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에게 돌릴 수 없는 이유는, 대통령실이나 국민의힘 모두 정책 입법에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석달 동안 집권여당이 한 일은 당대표를 쫓아내기 위한 내부 권력투쟁 뿐이다. ‘내부총질’이라는 대통령의 원색적인 표현 외에 딱히 국민의 기억에 남는 일이 없다.

핵심 부처인 교육부와 보건복지부 장관이 아직 공석인 점도 과거 정부에선 보기 어려운 일이다. 역대 모든 정부가 첫 내각 인선에서 두세명의 총리 또는 장관후보자의 낙마를 경험했지만, 지금처럼 5명의 장관 또는 장관급 후보자가 줄줄이 그만두고 핵심 부처를 비운 채 출범 100일을 맞는 건 이례적이다. 외교통일 정책은 어떤가. 미국의 압박과 중국의 위협, 일본의 냉담한 태도와 북한의 거친 공세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의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윤 대통령에게 ‘러시아 스캔들’은 없지만, 하루아침에 대통령실을 옮길 정도로 무속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의구심은 두고두고 정치적 위험을 키울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통령 행정명령은 없지만, 정부 시행령으로 국회 입법을 무력화할 수는 있다. 행정안전부가 장관 시행령으로 경찰국을 신설한 것이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찰청법 시행령을 고쳐 검찰 수사권을 되살린 것은 트럼프의 행정명령 강행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취임 100일을 맞은 트럼프의 국정 지지율은 40%(갤럽 조사)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이보다 훨씬 낮은 28%(한국방송-한국리서치 조사)다. 다르지 않은 건, “여론조사를 믿지 않는다”는 트럼프나 “여론조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두 대통령의 정신 승리다.

윤 대통령은 17일 기자회견에서 지난 100일간의 성과와 치적을 강조했을 뿐, 성찰과 변화의 의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전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을 폐기하고, 경제 기조를 정상화하고, 상식을 복원하고, 자유·인권·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켜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과거 어느 누구도 우리만큼 일을 잘하지 못했다”고 했던 트럼프의 오만과 독선을 보는 듯하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우리 모두가 똑똑히 알고 있다.

s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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