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탈세계화 시대 '반도체 패권'
韓·美·日·대만 '칩4'로 자국중심 공급망 구축 시도
양자택일 강요 받는 韓..진영논리로는 해결 안 돼
중국을 향한 미국의 반도체 기술 제재 강도는 점점 세지고 있다. 이달 초 중국의 SMIC가 7나노 반도체 기술로 양산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미국 상무부는 미국산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중국 수출 통제 기준을 기존 10나노에서 14나노로 강화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은 제재를 가속하고 있다. 이미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때 필요한 극자외선(EUV) 스캐너의 중국 수출을 금했지만 구형 심자외선(DUV) 스캐너의 중국 수출까지 막으려 네덜란드의 ASML, 일본의 니콘과 캐논 등에 압박을 가한다고 한다.
반도체 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포토공정의 DUV 스캐너까지 막힌다면 중국 반도체 산업은 치명타를 받을 것이다.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수십년 동안 스캐너 국산화를 추진했지만 아직 성과가 별로 없었고, 가까운 시일 내에도 스캐너를 국산화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ASML, 니콘, 캐논이 EUV 및 DUV 스캐너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수십만 가지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가 필요하다. 이 소부장은 수백 개 나라, 수십만 개 회사가 협력해서 만든 미국 중심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산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구축
사실 반도체만 보면 2022년 기준 6000억달러 시장으로 세계 전체 경제에서는 큰 시장이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전자, 자동차, 첨단 방위산업, 우주항공 등 주요 산업이 반도체 성능의 영향에 받기 때문에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것이다.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인공지능(AI), 클라우드,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은 반도체 기술이 발전하면서 떠오르는 산업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달 9일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꺾기 위해 반도체 산업과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자하는 내용의 '반도체 산업육성법'을 공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2800억달러에 이르는 투자법안에 서명하면서 “미국이 돌아왔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손가락보다 작은 반도체가 스마트폰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면서 “30년 전에는 미국에서 전체 반도체의 30%가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10%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국기업들도 미국에 수백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하며 미국의 반도체 회귀전략에 부응했다.
반도체는 19세기에 발견됐지만 산업화한 종주국은 미국이었다. 1947년 벨연구소에서 점 접점 트랜지스터가 개발됐다. 1970년대까지는 IBM,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모토롤라, 인텔 등 미국 기업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 뒤를 필립스·지멘스 등 유럽기업, NEC·도시바·히타치 등 일본기업이 추격했다. 1980~1990년대 초까지는 일본기업이 독주했지만 미국의 강요에 의해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고, 일본 반도체 기업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 기업이 주도권을 되찾았고, 그 틈새에서 한국과 대만기업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 반도체 발전에는 한국의 뛰어난 엔지니어의 헌신도 있었지만 배경에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견제가 있었다. 일본이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손발이 묶이자 한국은 1990년대 이후 일본, 미국, 대만의 경쟁사를 이겨 내며 메모리 반도체 중심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반도체 엔지니어들이 수직계열화된 종합반도체 회사(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에서 퇴사해 반도체 설계 전문 벤처기업인 팹리스를 설립하기 시작했고, 대만의 TSMC 같은 파운드리들이 위탁생산을 해 주는 분업체제가 만들어졌다. 이 덕분에 대만 파운드리 산업도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 과정에 미국·일본 중심의 반도체 생산 중심축이 한국, 대만, 중국으로 옮겨 왔다.
때마침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거세진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세계화의 거센 파도가 밀려왔다. 대항해시대, 산업혁명, 제국주의 시대, 서구의 경험과 자신감이 세계화의 동력이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싸게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중국으로 공장이 몰려 갔고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며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강대국이 되었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도 지난 30년 동안의 세계화와 중국의 부상 덕분에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필자의 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도 수만대의 중고장비를 사고 팔면서 함께 성장했다. 중고장비를 사고파는 과정에 고객이 왜 중고장비를 사고 파는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세계적인 공급망, 전자산업의 흐름, 국가경쟁력, 기술경쟁력, 경영전략 등이 자연스럽게 보였다. TSMC가 미국에 팹을 운영했을 때 비용이 대만보다 50% 더 들었다고 한다. 미국·유럽·일본 기업의 생산원가가 한국·대만·중국보다 훨씬 높았고. 벼농사 문화권인 한국·대만·중국의 원가 경쟁력을 쫓아가기 어려웠다.
세계 공급망은 중국 중심으로 더 촘촘하게 연결됐다. 세계화의 과실도 중국이 가장 많이 가져갔다. 지나고 보니 가장 큰 피해자는 선진국들의 중산층이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집권과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으로 세계화 시대가 저물기 시작했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취약해진 세계 공급망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마스크 대란이 있어났고, 반도체가 없어서 자동차를 만들지 못했고, 곡물과 원자재 가격이 치솟았다. 공급망 타격을 받은 세계 각국에서는 핵심소재와 원부자재를 국내생산으로 돌리는 리쇼어링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을 수 있을까?
요즘은 식당에 가서도 원산지를 보면 지구촌 구석구석 여러 나라 농수산물들이 밥상에 한꺼번에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손톱만한 반도체 하나를 만드는 데는 훨씬 더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이 작동된다. 작은 반도체 팹에서도 수십개 나라 수많은 기업의 집단적 협력이 있어야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 반도체는 어느 한 국가가 독점적으로 전체 소부장을 지배해서 최종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가장 세계화되고 고도로 분업화된 산업이기 때문이다. 종주국 미국은 설계·소부장에 강하고 중국은 후공정·희토류 등 원부자재와 단순 조립공정에 강하다. 반도체 공급망에서 세계 반도체의 절반을 쓰는 최대 시장인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미국은 반도체 첨단기술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려 한다. 미국이 지배하는 소부장 분야에 장벽을 쌓는다면 중국은 이 장벽을 쉽게 넘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첨단 공정이 아닌 성숙 공정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중국이 성숙 공정에서는 이미 글로벌 공급망에 깊이 들어와 있다. 지난 코로나 기간 2년 도중에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반도체 기업 20개를 블룸버그에서 분석했더니 상위 20개 기업 가운데 19개 기업이 중국기업이었다. 코로나 이전까지 내가 아는 중국 반도체 팹 대부분이 적자였으나 코로나 이후 반도체 공급난이 생기자 상당수 중국 반도체 팹들이 흑자로 전환됐다. 코로나를 계기로 성숙 공정의 중국 반도체 팹들은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이미 중국은 첨단 공정보다는 성숙 공정, SiC 및 GaN 등 화합물 반도체 쪽에 투자를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수출통제 정책이 어떤 수준까지 진행될지가 관건이지만 중국의 첨단 공정 진입은 점점 더 험난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아킬레스건이면서, 미래 산업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 굴기를 집요하고 절박하게 추진할 것이다.
◇한국의 선택지는?
미국은 메모리 강자 한국, 파운드리 강자 대만,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강자 일본과 함께 칩4 동맹을 조직해 중국을 견제하면서 미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려 한다. 중국은 한국에 칩4를 가입하지 말라고 “상업적 자살행위”라는 경고까지 날리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은 미국의 대 중국 반도체 제재에 따라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우리 정부가 '어떤 정책을 택하냐'에 따라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었다. 다른 나라 입장에서 한국기업의 메모리는 '사냐 안 사냐'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잘살 수 있냐'가 중요하다.
30여년 동안 사업을 하면서 나름 지키고 있는 철칙 가운데 하나가 '적을 만들지 않는다'이다. 함부로 상대방을 재단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회사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의사결정을 해 왔다. 국가 경영이라는 것도 똑같을 것이다. 섣부른 진영 논리는 답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 입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순간순간 꺼낼 수 있는 카드도 다양해진다.
1623년 임진왜란의 참화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조선에서는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새 왕으로 옹립됐다. 광해군 폐위의 명분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살제폐모(殺弟廢母)와 숭명배청(崇明排淸)이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여진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한 것도 명나라를 숭상하는 서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 외교의 핵심은 중국에 대한 조공과 책봉이었다.
조선 대신들은 인조의 책봉을 받으려고 자금성 앞에서 비를 맞으며 무릎 꿇고 호소했으며, 명이 여진을 칠 때 군사를 지원한다는 약속을 하고 8개월 만에 간신히 책봉을 받아 냈다. 인조와 서인들은 청나라의 굴기를 잘 알면서도 명나라 숭상이라는 명분에만 집착했다.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국토를 전란에 휩싸이게 만들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인조가 세상 물정을 조금만 더 현실적으로 봤더라도 병자호란 같은 참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앞으로 수십 년 더 갈 것이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구축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미국이 지난 30년 동안 잃어버린 제조업 경쟁력을 부활시킬 수 있을지 여부이다. 정부에서 아무리 예산을 많이 쓴다 해도 기업의 경쟁력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 재구축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미국의 견제를 받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 또한 험난할 여정을 걸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양자택일을 강요받을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ASML이라는 스캐너 회사가 하나 있어서 국격이 올라가듯 한국이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의 입지도 결코 좁지만은 않을 것이다.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bruce@surplusglobal.com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30년 동안 40여개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수십억달러어치를 사고판 무역 일꾼이다. 2000년에 기업 전자상거래 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의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해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해서 이사장직을 맡는 등 사회 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의 조직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을 받았다. 서플러스글로벌은 2018년 포브스 아시아 200대 유망 기업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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