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발레리노 김기민이 가장 마음에 들어한 찬사는?
1783년 설립돼 고전 발레의 꽃을 피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유일한 아시아인 수석 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는 김기민(30)은 ‘지금까지 자신이 들은 찬사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찬사를 꼽아 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약 4년 만에 한국을 찾아 18~20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펼칠 ‘발레 슈프림 2022’ 갈라 공연을 앞두고 만난 자리에서다. 16일 모교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무용원에서 연습 일정 등을 마친 김기민과 인근 예술의전당에서 인터뷰했다.
김기민에게는 ‘중력을 거스르는 도약’, ‘시간이 멈춘 듯한 점프’, ‘롤스로이스 엔진처럼 돌아가는 부드러운 회전’, ‘우아한 움직임’ 등 대중과 언론의 각종 찬사가 잇따른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발레 대가들의 애정어린 칭찬이 생애 최고의 찬사라고 했다. 전설적 발레리나이자 안무가인 마카로바는 마린스키발레단 출신으로 1970년 영국 런던 순회 공연 중 망명한 뒤 영국 로열발레단과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등에서 활동했다. 볼쇼이발레단의 전설 바실리예프는 김기민이 대상을 받아 병역 면제를 받게 되는 2012년 아라베스크 국제 발레콩쿠르(러시아)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다. “마카로바가 저를 너무 아껴주셔서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데 영광스럽죠. (볼쇼이발레단 상징과도 같은) 바실리예프의 경우 (볼쇼이 극장 맞수인) 마린스키 극장에 와서 공연 본 것 자체가 러시아에선 굉장한 뉴스예요. 그분이 우리 단장한테 ‘아라베스크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줬던 김기민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전막 공연을 보고 싶다’고 연락했단 얘기를 공연 직전에 듣고서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존경하는 무용수 앞에서 가장 자신 있는 작품(‘라 바야데르’)으로 칭찬을 들으니 (정말 날아갈 듯 기뻤어요.)”
“주변에서 ‘전생에 어떤 좋은 일을 했길래 그런 큰 영광을 누리나 (부러워)할 정도로 단독 리사이틀을 두 번이나 한 건 개인적으로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23살 때 첫 기회가 왔을 때 부상으로 못하고 1년 정도 쉬게 돼 많이 슬펐는데 그때 안 하길 잘 한 것 같아요. 그 당시는 ‘최연소 타이틀’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춤의 완벽성을 중요시 하다 보니 미루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김기민이 2019년 첫 단독 리사이틀 무대 당시 초대해 호흡을 맞추고 이후 스페인 갈라 공연 등 두 세 차례 함께 춤을 췄던 영국 로열발레단 간판급 발레리나 마리아넬라 누네즈가 이번 갈라 공연 때도 파트너로 참여한다. 두 사람은 한국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으로 ‘해적’과 ‘돈키호테’의 그랑 파드되(2인무)를 골랐다.
앞서 김기민은 지난해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 주인공 솔로르 역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무산되면서 2018년 11월 마린스키 발레단의 ‘돈키호테’ 내한 무대 이후 한국 무대에 서지 못했다.
“늘 한국 무대에 서길 바라고, 국립발레단 공연도 정말 하고 싶었던 무대인데 취소돼 미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어떤 작품으로든 한국 관객과 소통하고 싶었는데, 평소 친한 사이인 각 발레단 스타급 무용수들과 함께 하는 갈라 무대로 좋은 에너지를 한국 팬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돼 기뻐요. 저는 예술이 삶의 풍요로움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많은 분이 이 공연을 보시고 발레를 가까이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예컨대 큰 장점인 점프력만 해도 어떻게 하면 다른 무용수와 차별화해서 뛸지 항상 연구했다. “단점도 많은데 안 보일 정도로 나만의 장점인 표현력이나 테크닉, 점프, 음악성 등을 더 크게 부각시키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사실 서양 무용수보다 신체 조건이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이런 걸 보완하려고 같은 점프를 하더라도 더 가볍게 높이 뛰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습했어요. 또 음악 템포에 맞춰 뛸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 타이밍까지 기다렸다가 순간적으로 빠르게 도약하고 공중에서 힘을 풀려고 헤엄치는 상상도 하는 등 연구를 많이 합니다.”
작품 선택에 신중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란다. “(발레가 서양 춤이라) 다리 라인 등 신체 조건을 아시아인이 서양인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와서 한국무용하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그래서 제가 완벽하게 출 수 있다고 판단되지 않는 작품은 (솔깃한) 제안이 들어와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역할도 첫 제안이 들어온 지 5∼6년 지나서야 했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얘기하는 게 ‘아시아인 발레 무용수로서 (신체 조건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서양 무용수들과 똑같이 잘하면 안 되고, 그들보다 훨씬 잘 해야 무대에 주역으로 설 수 있다’고 조언해줍니다.”
“28∼34세를 무용수 전성기로 봅니다. 그 이상 나이를 먹으면 경험이 많아져 예술성이 더 좋아질 수 있지만 피지컬(체력)이 못 따라오게 돼요. 저는 (경험이 쌓여 예술성과 작품 해석력 등이 최상이 될) 42∼46세를 전성기 목표로 잡았어요. (이번 갈라 공연에 오는) 프리드만 포겔이 올해 43살인데, 자신의 전성기는 지금이라고 하더군요. 저 역시 그러고 싶어서 매일 근력운동을 하는 등 체력 관리에 신경쓰고 있습니다.”
실제 그는 올 상반기에만 전막 발레 20여개 작품을 40여차례 공연하는 등 살인적 스케줄을 거뜬히 소화했다. 2주 동안 6개의 다른 전막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클래식 발레에 익숙한 그는 요즘 모던·현대 발레에도 관심이 많다. “(어쩔 수 없이 많은 도약과 기술로 몸에 무리가 많은) 클래식 발레는 지금 시기만 할 수 있어서 클래식 발레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깊은 감정을 더 반영할 수 있는 모던 발레에도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재작년에 처음 해본 ‘달에 홀린 피에로’(독일 작곡가 쇤베르크 연가곡에 라트만스키가 안무해 마린스키 극장에서 2008년 초연한 현대발레)는 아주 아끼는 작품으로, 기쁨과 슬픔, 고뇌 등 살아오면서 느낀 모든 감정을 쏟아냈어요. 굉장히 철학적이고, 관객과 무용수 모두 공부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인데 정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여러가지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달에 홀린 피에로’)춤을 추고 나면 ‘라 바야데르’랑 ‘로미오와 줄리엣’ 등 다른 작품을 할 때도 기존과 다르게 춤을 추게 돼요. 저는 아직 계속해서 배워야 하는 단계로, 발레를 더 잘하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편식 안 하고 골고루 먹으려 합니다.”
김기민은 한국 발레 교육 시스템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비치면서, 국내외 발레계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무용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국 발레 선생님들 수준은 정말 높은데 입시 때문에 아이들이 시험에만 맞춰진 발레를 하는 시스템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왜 발레를 하고 싶어하는지 꿈을 꾸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며 기본기를 충실히 다질 수 있는 교육환경이 조성되길 바랍니다. (그리 되면,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좋은 안무가와 창작 발레가 나오게 되고 한국 발레만의 스타일도 생길 거라고 봐요. 그리고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한국 발레나 세계 발레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무용수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 무용수가 되겠다는 욕심보다 저로 인해서 윗세대나 다음 세대가 좋은 영향을 받는 무용수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글·사진=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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