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피곤할수록 충동적 선택.. 중요한 결정, 밤엔 피하세요
신경전달물질 글루타메이트 과다 축적
뉴런에 독성으로 작용해 정보전달 약화
피로감은 뇌 보호 위해 일 멈추라는 신호
“생각하는 것은 모든 노동 중에서 가장 힘들고 지치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생각을 피한다.”
한 온라인 명언 모음집에 올라 있는 미국 작가 왈리스 와틀스(1860~1911)의 말이다. 실제로 자리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집중해 뭔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심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걸 느끼게 된다.
무게는 몸의 2%이지만 에너지는 전체의 20%를 쓴다는 뇌를 장시간 혹사시켰으니 그런가보다 여기지만 사실 구체적인 원인은 과학계에서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뇌연구소(PBI) 과학자들이 최근 이를 설명해줄 수 있는 뇌의 대사 메카니즘을 발견했다.
장시간 정신노동의 결과로 뇌에 쌓이는 물질의 정체를 찾아낸 것. 연구진은 장시간 일에 집중하면 뇌 앞쪽의 전전두엽 피질에 글루타메이트(글루탐산)이 축적되고, 이것이 피로감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국제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글루타메이트가 많이 쌓이게 되면 정신을 집중해 일을 진행하거나 의사결정을 하기가 어려워진다고 밝혔다.
글루타메이트의 정체는?
연구진은 정신적 피로감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생체 조직의 대사 과정에서 분비되는 화학 물질을 측정하는 자기공명분광법(MRS) 기술을 이용했다.
연구진이 이 장치를 이용해 의사 결정을 하고 계획을 세우는 등 고도의 정신 작업을 관장하는 ‘외측 전전두엽 피질’(lateral prefrontal cortex)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봤다.
연구진은 우선 40명의 실험 참가자를 모집한 뒤, 이들을 어려운 과제를 처리하는 그룹과 쉬운 과제를 처리하는 그룹으로 나눴다.
이어 이들에게 각기 과제를 주고 뇌 측정 스캐너에 누워서 과제를 수행하도록 했다. 예컨대 1.6초 간격으로 다른 숫자를 화면에 보여주면서 지금 보여주는 문자가 이전 것과 같은지 여부를 말하도록 했다. 26명에겐 이전에 보여준 3개 문자와의 일치 여부를 판단하는 고난도 문제를, 14명에겐 이보다 쉬운 문제를 줬다.
스캐너가 기록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참가자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뇌에서는 신경세포 간 신호전달 물질인 글루타메이트 등 8가지 화학물질이 분비된 것으로 나타났다.
신경세포에서 나오는 전기적 신호는 그 자체로는 신경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를 넘어가지 못한다. 대신 글루타메이트 같은 화합물이 분비돼 신호를 다른 신경세포로 전달해준다. 글루타메이트는 뉴런간 정보 전달의 90% 이상을 책임지는 핵심 물질이다. 신경세포간 접합부위인 시냅스의 작은 주머니(소포)들에는 한 주머니당 8천개의 글루타메이트 분자가 들어 있다.
6시간의 기억력 테스트가 끝난 뒤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푼 참가자들의 글루타메이트 수치는 실험을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많이 올라갔다. 피로감의 또다른 지표인 동공 확장 현상도 관찰됐다.
쉬운 문제를 푼 참가자들의 글루타메이트 수치는 처음과 거의 같았다. 이들도 피로감을 호소했지만 동공 확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글루타메이트를 제외한 7가지 다른 화학물질은 변함이 없었다.
충동적 결정 많아지는 건 뇌의 방어 전략
연구진은 이와 함께 정신적 피로가 의사결정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지쳤을 경우 인내하는 대신 즉시 누릴 수 있는 것을 추구하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소액의 돈을 당장 받을지, 아니면 나중에 더 많은 돈을 받을지 선택하도록 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느라 피로감을 더 느낀, 그래서 글루타메이트도 더 많이 쌓인 참가자들은 소액의 보상금을 즉시 받는 쪽을 더 많이 택했다. 어려운 문제를 푼 그룹은 전체적으로 글루타메이트 수치가 8% 증가했고, 충동적인 선택을 10% 더 많이 했다.
글루타메이트는 중추신경계의 핵심적인 흥분성 신경전달물질로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질이 원활하게 기능을 하기 위해선 억제성 신경전달 물질인 가바(GABA)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글루타메이트가 지나치게 많으면 신경세포(뉴런)에 독성으로 작용해 뉴런을 죽게 한다. 이는 신경전달 물질의 균형을 파괴해 정보 전달기능을 떨어뜨린다.
연구진은 어려운 문제를 푸는 데 지친 사람들이 충동적인 선택을 더 많이 하는 것은 뉴런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글루타메이트가 과도하게 쌓이는 걸 막으려는 뇌의 방어 작전일 수 있다고 추론했다. 이번 연구 결과를 적용하면 어떤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할 경우 되도록이면 밤은 피하는 것이 좋다. 하루종일 정신 노동을 한 뒤끝이라 충동적 결정을 할 가능성이 있다.
뇌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말해주는 지표
연구진의 일원인 피티에-살페트리에르대의 마티아스 페실리옹 교수는 보도자료에서 “이번 연구는 인지 작업이 뇌에 ‘유해 물질 축적’(글루타메이트 증가)을 초래한다는 걸 보여준다”며 “따라서 피로감은 뇌의 정상적 기능을 보존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라는 신호”라고 말했다. 그는 글루타메이트는 잠자는 동안 시냅스에서 제거되는데 다음날 아침 상쾌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세바스티안 무슬릭 브라운대 교수(신경과학)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인터뷰에서 대사 폐기물이 인지적 피로를 유발하는 핵심 원인물질일 것이라는 데 의구심을 표명했다. 그는 대신 글루타메이트의 증가는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몸의 기관들은 뇌와의 교신을 통해 먹고 자고 물 마시고 잠을 자야 할 때를 알려주는데 전전두엽피질의 글루타메이트가 뇌의 내부 모니터링 시스템에 최신 상태를 업데이트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논문 제1저자인 안토니우스 빌러 연구원도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하는 것이 뇌에서 독성이 있는 글루타메이트를 늘리는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다”며 확대 해석은 경계했다.
스위스 취리히대 레토 후버 교수는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에 이번 연구에서 측정한 뇌의 글루타메이트 수치는 뇌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지표로 유망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글루타메이트 측정은 코로나19를 앓고난 뒤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은 뇌안개(brain fog) 후유증, 어린이들의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처럼 주의 집중이 어려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진단하는 데도 사용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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