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장강명 "공허·불안 내재한 현대사회 구조 짚으려 했다"

성도현 2022. 8. 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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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만에 장편 '재수사' 출간.."의미있는 불행이 무의미한 행복보다 나을수도"
"벽 하나 넘은 기분에 후련..'소설가 2기'로 가는 분수령 될 것"
인터뷰하는 장강명 작가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신간 '재수사'를 출간하는 장강명 작가가 지난 1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2.8.17 mjkang@yna.co.kr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현대사회는 풍요로운 것 같은데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건 '공허'와 '불안' 때문이에요. 그 기원이 우리 사회 시스템에 내재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사회 구조를 짚으면서 기초가 되는 사상들을 밑바닥부터 한번 흔들어보고 싶었어요."

'한국이 싫어서', '우리의 소원은 전쟁' 등 한국 사회의 단면을 조명한 책들로 주목을 받은 소설가 장강명(47)이 이번에는 첫 사회파 추리소설 '재수사'를 냈다. 22년 전 발생한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 재수사 이야기이지만, 18세기 계몽주의에서 시작해 2020년대 한국 사회 모습까지 철학적 고민거리를 여럿 던진다.

신작 장편소설 '재수사' 출간을 맞아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만난 장강명은 "우리가 한 발 나아갈 새로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공허와 불안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며 "행복을 인생이나 사회의 목표로 삼는 건 잘못"이라고 말했다.

또 "18세기 계몽주의는 각자 알아서 삶의 목적을 찾으라고 주문한다. 개인이 최선의 판단을 내릴 거라고 보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이라며 "제가 그리는 세상에선 삶의 목적이 우선한다. '행복'이 아닌 '의미'를 인생의 목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의미 있는 불행이 의미 없는 행복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강명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온 현대사회의 기초 사상인 휴머니즘 등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 범죄자의 입을 빌어 풀어내고자 했다"며 신계몽주의 인권 규범과 형사사법시스템에 따르면 기존 사회 구조에서 살인자가 받을 형량도 재평가될 수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도 펼친다.

신작 장편 '재수사' 출간한 소설가 장강명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신간 '재수사'를 출간하는 장강명 작가가 지난 1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연합뉴스 인터뷰 전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8.17 mjkang@yna.co.kr

소설은 크게 범인의 회고록과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소속 연지혜 형사의 수사라는 두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어진다. 2000년 여름 신촌에서 여대생 민소림을 죽인 범인은 회고록 속에서 살인 과정과 자신의 심리 상태에 관해 자세히 묘사한다. '사실-상상 복합체' 등의 개념을 제시하며 살인 행위를 정당화한다.

재수사팀 막내인 연지혜 형사는 DNA 검사 결과와 한 장의 폐쇄회로(CC)TV 사진, 3천 쪽 분량의 수사기록을 검토하며 과거 수사에서 미진한 부분을 발견한다. 민소림이 미등록 도스토옙스키 독서 모임 멤버였다는 사실 등을 새롭게 파악한 뒤 당시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던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며 사건의 퍼즐을 맞춰간다.

'재수사'는 장강명의 데뷔작 '표백'과도 닮았다. 신촌에서 발생한 여대생의 죽음, 그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 궤변 같은 사상을 주창하는 인물 등이 그렇다. 다만 '표백'처럼 세상이 사실상 끝났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죽어야 한다는 식의 체념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나아간다.

소설은 곳곳에서 한국의 형사사법시스템을 언급한다. 장강명이 그간 시스템 안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썼다면 '재수사'에선 시스템을 지키는 사람들, 경찰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과장된 액션이나 초능력 같은 도구 없이 현실적인 경찰 소설을 쓰겠다는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한 것 같다"고 했다.

장강명은 경찰 수사부터 법원 재판까지 이어지는 형사사법시스템 자체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대신 시스템 및 기초가 되는 여러 사상에 주목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나 정교한지, 우리가 삶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느냐에 대한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하는 장강명 작가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신간 '재수사'를 출간하는 장강명 작가가 지난 1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2.8.17 mjkang@yna.co.kr

그는 목적 없이 바쁘고 정신없는 현대인의 삶을 '공허'와 연결하고자 사건의 공간적 배경을 신촌으로 설정했다. 또 파편화된 개인의 삶과 무너진 공동체를 그리기 위해 대학 학부제 실패 사례를 소재로 썼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부품화된 개인들을 나타내기 위해 도스토옙스키 독서 모임 멤버들의 현재 삶을 소개했다.

두 권으로 구성된 '재수사'는 원고지 3천40매 분량으로, 전작 장편 '우리의 소원은 전쟁'(1천850매)보다 2배 가까이 된다. 장강명은 2018년에 각종 인터뷰 등 취재를 거쳐 큰 틀을 구상한 뒤 2019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 지난달 말 완성했다. 처음엔 금방 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길어져 3년이 걸렸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 묵직한 진단을 내려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추리소설 집필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1천600매 정도 쓰고 마음에 들지 않아 갈아엎었다. 지난해 초에는 전업 작가로 생활하며 처음 슬럼프에 빠졌다. 등장인물들은 줄이고 범인의 생각에 비중을 두는 방식으로 형식에 변화를 주면서 계속 글을 썼다.

장강명은 "벽을 하나 넘은 기분에 기쁘고 후련했다. 앞으로 이 정도는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재수사'를 쓰는 내내 이 작품이 내 삶에 분수령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삶이 소설가 1기였다면 앞으로는 2기다. 좀 더 중량감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다작(多作)으로 유명한 그는 올해 10월과 내년에 에세이 두세 권을 출간할 계획이다. 공상과학(SF) 소설집 '육식성'(가제) 출간도 내년으로 예정돼 있다. 차기 장편은 '할루엘라'(가제)다. 교회 용어 '할렐루야'를 변형한 것으로, 사악한 신이 세상을 만든 거라면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다.

장강명 장편소설 '재수사' [은행나무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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