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를 보내고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

한겨레 2022. 8. 1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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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신동흔의 치유적 신화읽기]삶과 죽음 사이의 심연을 넘어서
오르페우스의 길과 청정각시의 길
픽사베이

◆ 받아들이기 어려운 죽음이라는 현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죽음은 하나의 현실(現實)이다. 언젠가 그 현실은 닥쳐올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므로. 부정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이는 ‘논리’일 뿐이다.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 죽음이다. 더없이 절망적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다. 그 반짝이는 눈을 더이상 못 본다는 것은, 따뜻한 손을 더는 못 잡는다는 것은 얼마나 아득한 일인지. 까마득한 무망감에 세상만사는 빛을 잃는다.

떠나는 이는 차라리 나을 수 있다. 떠나면 그만이므로. 또는 이미 떠나진 것이므로.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지만, 경계를 넘어선 뒤의 그것은 이미 받아들여진 현실이다. 떠난 자는 말이 없다. 기쁨이나 고통도 더이상 그의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남은 이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금할 수 없는 고통의 시작이다. 떠난 이가 묻고 간 고통까지도 남은 이의 몫이 된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 상황에서도 절망감은 가히 피하기 어렵거니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거짓말처럼 갑자기 찾아왔을 때, 작별의 몸짓조차 하지 못했을 때 남겨진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 부정’의 몸부림일 따름이다. 신(神)이 가장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 이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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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신의 장난에 직면해서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온몸을 던져서 맞서려 한 이들이 있다. 신의 섭리에 맞섬으로써 신화가 된 그 이야기들을 우리는 상징적 내면 서사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갈림길이 있다. 삶과 죽음, 또는 지옥과 천국을 가르는 서사적 갈림길이.

오르페우스와 두 번의 절망

사랑하는 이를 찾아 저승으로 들어간 인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그리스신화의 오르페우스일 것이다. 그가 되찾고자 한 사람은 아내인 에우리디케였다. 아내는 결혼한 지 열흘도 안 됐을 때 독사에 물려 숨을 거두었고, 오르페우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트라키아의 왕 오이아그루스와 서사시의 뮤즈 칼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오르페우스는 뛰어난 시인이자 음악가였다. 그의 리라 연주는 너무나 뛰어나서 목석을 춤추게 하고 맹수를 얌전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가 아폴론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음악의 신’이라 할 만한 능력에 따른 서사적 연결일 것이다. 음악은 약동하는 생명력의 미적 정수에 해당하는 바, 오르페우스는 에로스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목석을 춤추게 만드는 존재라면 에로스 이상의 에로스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러한 존재일진데 오르페우스가 행한 사랑이 특별한 것이었음은 자명하다.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는 님프(nymph)였다. 목석을 춤추게 하는 생명력 충만한 님프와 인연을 이루는 서사적 고리가 되었을 것이다.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청년과 그 선율에 맞추어 춤추는 요정. 젊고 아름다운 생명력의 극한을 보여주는 형상이다. 온 세상이 부러워했을 것이다. 어쩌면 하늘에 있는 신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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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사랑과 그 행복은 영원할 수 없었다. 봉오리가 채 피어나기도 전에 미친 비바람이 불어와 꽃송이를 통째로 꺾어버린다. 역설적인 일은 에우리디케의 죽음이 꽃을 꺾으러 계곡에 갔다가 벌어진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꽃을 꺾으러 갔다가 스스로 꺾인 상황이니, 어찌 보면 필연일 수 있다. 꽃은 피면 지게 돼 있거니와, 눈에 띄는 예쁜 꽃은 노림의 대상이 되곤 한다. 에우리디케는 자신의 미모에 혹한 목동의 접근을 피하려다 독사에 물린 것이다. 그늘 속에 도사린 사신(死神) 타나토스가 틈을 놓치지 않고 덮친 형국이니 일컬어 ‘신(神)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오르페우스는 그 일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의 선택은 아내를 찾아 저승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헤라클레스가 힘으로 저승을 왕래하고 시시포스가 꾀로 저승에 다녀왔다면 오르페우스의 수단은 음악이었다. 냉정한 뱃사공 카론과 흉포한 케르베로스도, 통곡과 망각의 강도 그를 막지 못하거니와, 음악으로 표상되는 에로스의 힘이었다. 그는 금치 못할 생명적 열정으로 지옥의 음산한 기운을 이겨낸 것이었다. 에로스의 폭주!

오르페우스는 그 힘으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까지 감복시키고 아내와 이승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저승을 벗어날 때까지 뒤돌아서 아내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는 것. 산 자와 죽은 자는 눈길을 나누지 못하는 것이 저승이 법칙이었다. 일각이 여삼추였을 기나긴 귀환의 길에 오르페우스는 하고 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금기를 지키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은 허사가 된다. 동굴 밖 이승에 발을 내민 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직 저승을 벗어나지 못했던 아내는 그대로 저승의 심연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르페우스는 다시 저승으로 들어 갈 수 없었고, 아내를 만날 수 없었다. 아내의 죽음에 이은 두번째 절망이거니와, 이번의 것은 더 결정적이었다. 폭주하던 에로스는 마침내 소진되어 힘을 낼 수 없었다. 뱃사공 카론이 그의 연주에 다시 마음을 주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이제 타나토스에 눌린 허깨비였으므로.

일련의 과정을 심리적으로 해석하면,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면서 그 생명의 끈을 억지로 붙잡으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가 저승으로 들어가 아내를 만난 일은 강한 심리적 집착에 의한 환각으로 보면 어울린다. 환각은 환각일 뿐, 그가 만난 아내는 실상(實像)일 수 없었다. 뒤돌아 진실과 대면하는 순간 사라져버릴 허상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눈길을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 그가 필연적으로 직면할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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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진실에 직면했을 때 오르페우스가 밟아간 길이었다. 그는 모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절망의 그림자 속에 숨어버린다. 깊은 동굴에 들어가 신들을 자주하는 노래를 부르짖는 그는, 모든 여인의 구애를 물리치며 조소하는 그는 어김없는 타나토스의 화신이다. 몸은 살아있되 마음은 이미 죽어버린 존재. 그는 흥분한 젊은 여성들에 의해 몸이 찢겨서 죽었다고 하거니와, 하지만 결국 그 일은 자기 자신이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일이었다. 좋았던 지난 날에 대한 집착과 끝 모를 ‘현실 부정’ 속에서 그는 심리적으로 해체된 것이었다. 문학치료 식으로 말하면, 폭주 끝에 길을 잃어버린 서사가 어둠 속에서 해체돼 버린 상황이다. 세상에는 다시 해가 뜨기 마련이지만, 깊은 동굴 속에 스스로를 가둔 이에게는 그저 남의 일이다.

오르페우스가 죽은 뒤 제우스가 그의 리라를 거두어서 별자리로 만들었다고 하거니와, 나는 이를 오르페우스의 서사를 기리는 차원의 일이었다고 보지 않는다. 현실 부정을 통해 스스로를 깊은 동굴에 가둘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의 신화로 읽는다. 그러면서 문득 자신을 돌아본다. 지금 스스로 동굴에 들어와 웅크리고 있지 않은지를.

청정각시, 함께 죽어 함께 살다

죽은 이를 찾아서 저승으로 간 인물들은 동양의 신화에도 있다. 일본 신화에서 이자나기가 황천국으로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 이자나미를 찾아간 일이 유명하거니와, 이제 이야기하려는 것은 한국의 함경도 민간 신화의 사연이다. <도랑선비 청정각시 노래>가 그것으로, 이야기 주인공은 청정각시다. 갑자기 죽어버린 남편을 되찾기 위해 극심한 고통을 무릅쓰는 여인이다.

오르페우스는 아내와 결혼해서 며칠간 행복을 누렸거니와, 청정각시는 그런 시간도 허락받지 못한다. 혼례를 치르러 온 도랑선비가 정신이 혼미해져 누워있다가 본가로 돌아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청정각시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임종도 보지 못한 죽음이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 앞에 놓인 것은 하염없는 독수공방의 날이었거니와, 그걸 떠나서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이었다. 왜 하필 혼례식 날 신랑이 내 집에 와서 쓰러진단 말인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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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온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청정각시는 피눈물을 흘리며 울고 또 운다. 하염없는 통곡을 들은 옥황상제는 황금산 성인을 보냈는데, 청정각시는 그에게 죽은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걸한다. 그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성인의 말을 따라 남편 묘 앞에 이부자리를 펴고 사흘간 기도하고, 머리를 뽑아서 노끈을 꼰 뒤 손바닥을 꿰어서 빌고, 열 손가락에 기름을 바르고 불을 붙여서 발원을 한다. 그때마다 남편이 나타나지만 그가 안으려 하면 속절없이 사라진다. 청정각시가 그다음으로 한 일은 타다 남은 손으로 기나긴 고갯길을 닦는 일이었다. 가없는 고통 끝에 고갯마루에 이른 청정각시는 건너편에서 올라오던 남편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껴안는다. 마침내 남편을 찾는가 했지만, 기쁨은 잠깐이었다. 위태한 다리를 앞서서 건넌 청정각시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큰바람이 남편을 휘감아 물속으로 처넣는다. 그렇게 청정각시는 남편을 잃고 또 잃는다.

청정각시가 남편을 만난 일은 역시 환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낼 수 없다는 절실한 집착이 그를 나타나게 한 것이었다. 생각하면 더없이 애달픈 일이지만, 그것은 현실일 수 없다. 에우리디케가 그랬던 것처럼 도랑선비는 결국 저세 상으로 빨려갈 존재였다. 본인은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죽은 이의 모습을 보고 그 몸을 껴안았다는 것도 현실이 아닌 착각일 따름이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마침내 붙잡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을 다시 잃고 나서, 청정각시는 어떻게 됐을까?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절망과 죽음의 동굴에 갇혀버리거니와, 청정각시의 길은 그와 달랐다. 그는 도랑선비를 다시 만나서 그와 삶을 함께 하는 데 성공한다. 어디에선가 하면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

물로 떨어진 도랑선비는 망연자실한 아내에게 두 가지를 말한다. 한 가지는 자기가 죽은 일이 재물을 탐해서 백성을 죽인 할아버지 탓이라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이면의 숨은 업(業)이다. 도랑선비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내가 죽은 건 당신 탓이 아니야. 우리 조상님 때문이야. 원래 그리될 일이었어. 자책하지 마.” 그렇다. 이유 없는 죽음은 없다. 내 탓도 아니고, 네 탓도 아닌 그것은 신(神)의 탓이다. 사람은 누구든 죽는 법이고, 가는 길에 정해진 때는 없다.

도랑선비가 전한 또 다른 말은 자기와 함께 살려거든 집에 돌아가서 조상님이 심은 나무를 활용해 죽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저승에서 둘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죽는 법’을 깨달은 청정각시는 자결해서 저승으로 간다. 가서 보니 도랑선비는 잘 지내고 있었다.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남편과 다시 만나 무한한 낙을 받은 청정각시는 뒷날 남편과 함께 환생해서 신으로 모셔진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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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황당한 전개로 느껴질 것이다. 자살해서 다시 만나다니! 분명 그대로라면 산 사람까지 죽은 상황이니 최악의 진행이다. 남편을 따라서 죽어야 했던 슬픈 열녀(烈女)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청정각시의 죽음은 신화적 상징으로 읽는 것이 어울린다. 그것은 실제적 죽음이 아닌 심리적 죽음, 또는 ‘서사적 죽음’으로 봄이 합당하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매달려 집착하던 존재의 죽음’이다. 청정각시가 도랑선비와 더불어 낙을 누렸다는 저승, 곧 ‘저 생(生)’은 그녀의 마음속이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몸은 여기 있되 마음을 저 너머로까지 넓혀서 남편을 품어 안았다는 것이다. 그가 평안히 잘 지내고 있음을 믿으면서 마음으로 함께하는 동반의 삶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단절된 서사의 초극적 연결이다. ‘죽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반전이다.

일어서서 거듭나기 위하여

청정각시의 죽음에 대한 심리적 독해는 꽤 무리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그 죽음이 ‘제의’에서 구현되는 것임을 이해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도랑선비 청정각시 노래>는 망자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의례인 망묵굿에서 구송되는 신화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의 길을 따라서 망자를 만나고 또 떠나보낸다. 청정각시가 손에 불을 붙일 때 그들 또한 마음의 손에 불을 붙인다. 타버린 손가락으로 고갯길을 닦으며 올라가서 죽은 사람을 껴안는다. 차마 보낼 수 없는 그 사람을.

눈물로 가득한 그 제의적 한풀이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죽인다. 청정각시가 죽을 때 그들도 함께 죽는다. 그렇게 망자를 떠나보내며, 동시에 그와 하나가 된다. 삶과 죽음의 심연을 가로질러서 그를 내 안에 품는다. 영원히. 그곳에서 잘 살아갈 그와 오래도록 함께하는 길은 이곳에서 훌륭히 잘사는 것이다. 나중에 진짜로 저승에 가서 다시 만날 때 서로 부끄럼 없이 손잡을 수 있도록.

함경도 망묵굿. 신동흔 교수 제공

2019년 11월, 돈화문 국악당에서 무박 2일로 함경도 망묵굿이 펼쳐졌다. 무대에서 잠시 발언할 기회는 얻는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늘 여기에 죽으러 왔습니다. 청정각시와 함께 죽고, 그 죽음을 통해 거듭나려고 합니다.” 내가 말했던 것은 물론 ‘제의적 죽음’이다. 내 마음속의 집착과 거침을 씻어내는, 내 안의 라그나로크를 니르바나(nirvana)로 풀어내는 신화적 죽음. 이야기는 그 죽음을 주인공 이름을 통해 ‘청정(淸淨)’이라고 말한다. 절망의 동굴을 뚫고 나와 청정의 존재로 나아간 사람. 신화가 그에게 붙인 호칭은 바로 ‘신(神)’이다.

수십년 전,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누님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모습이 지금껏 눈에 선하다. 사람들이 누님에게 다가와서 한 말은 한결같았다. “산 사람은 살아.” 어린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산 사람은 산다는 것. 하지만 그건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살아내야 살아지는 법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해!” 하는 말이었다. 덧붙여 깨닫는 건, 그 살아냄이란 제대로 된 죽음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다시 나를 죽여야 할 때다. 일어서서 거듭나기 위하여.

신동흔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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