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축] 담양에 스며들다

유병숙 갑진건축사사무소 건축사(충남건축사회 부회장) 2022. 8. 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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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숙 갑진건축사사무소 건축사(충남건축사회 부회장)

가끔 집에 있다가 불현듯 "가자"하며 길을 나설 때가 있다. 늦은 아침 후 담양의 소쇄원을 보러 가자며 길을 재촉한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가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를 담아 조성한 곳으로,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다. 소쇄원의 자연스러움이 좋아서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수차례 다녀온 곳이기도 하다. 방문할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공간의 매력이기도 해서 자주 간다고 같은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방문한 소쇄원은 풍성하던 나무가 나이 들어 잘린 것인지 몇 그루의 나무는 그 흔적만 있을 뿐 숲속 깊이 푸르렀던 그 모습은 아니었으나, 원래 가지고 있던 멋은 잃지 않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어찌하겠는가. 자연의 변화를 고스란히 겪어내야 하므로 서운한 것은 사람의 몫이다.

최근 비가 적었는지 소쇄원을 관통해 흐르는 개울물이 적어 물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으나,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소쇄원은 그동안의 시간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두루 둘러보고 광풍곽에 앉아 여름 더위로 절로 흐르는 땀을 식혀가며 소쇄원을 바라보니 마음이 절로 평온해 진다. 이제 다시 길을 나설 시간이다.

소쇄원 지척에 2000년 10월 완공된 전통양식의 '가사한국문학관'이 있다. 담양은 '조선 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해 꽃을 피웠다. (중략)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면암 송순, 송강 정철, 허난설헌 등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그 중 소쇄처사 양산보의 글을 통해 소쇄원 48경으로 정원의 모습을 글로 만나 볼 수 있다. 관련된 다양한 글을 읽으니 소쇄원과 함께 일동(一洞)의 삼승(三勝)이라 일컬어지는 나머지 2곳의 정자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사문학관 인근에 있는 환벽당(環碧堂), 식영정(息影亭)이 그곳이다.

정자는 자연 안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나무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노송 사이로 보여졌던 식영정 석양은 하루의 피곤함을 잊게 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정철은 노송의 숲속에 묻힌 식영정의 정취와 주변의 경관을 즐기면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고 하니 정철도 그랬나 보다. 과연 구름도 쉬어갈 만한 곳이란 생각이 드는 곳이다.

식영정 아래의 숲에 자리잡은 부용정(芙蓉亭)과 서하당(棲霞堂)을 거닐며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는 석양을 보면서 정철의 송강정(松江亭)과 송순의 면앙정으로 서둘러 발길을 돌린다. 송강정에는 현판이 두 개가 있는데, 정철이 동인(東人)들의 압박에 못이겨 대사헌의 자리를 그만두고 하향해 초막을 짓고 살던 곳이라고 하여 당시에는 이 초막을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면앙정은 1533년 송순(宋純)이 건립한 정자로 이황을 비롯해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곳으로 유명하다.

짧은 하루에 만난 6개의 정자는 한결같이 자연 안에 순응하며 자리 잡고 있었으며, 절로 시가 나올 것 같은 절경의 일부가 돼 있었다. 건물을 돌아보며 마음이 평온했던 것은 가사문학의 멋스런 흥과 더불어 자연 위에 군림하는 건축물이 아닌 자연 안에 스며들고자 했던 조상들의 성정이 반영된 것일 것이다. 그렇게 가사문학의 대가들이 조성한 정자는 고스란히 담양의 자연 안에 스며들어 있었고, 방문자인 나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담양에서 최근 유명해졌다는 메타세콰이어길을 걸었다. 1972년 담양군에서 국도 24호선, 군청~금성면 원율삼거리 5㎞ 구간에 5년생 1300본을 식재해 조성한 길이다. 50년 전 심은 나무 덕분에 지금 길은 담양의 또 다른 명소가 됐다. 맨발로 가로수길에 발을 디디니 하루의 피로가 모두 사라지는 듯하다. 이렇게 담양에 스며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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