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광복절을 맞다

한겨레 2022. 8. 1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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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의 우연한 연결]한인 1세들이 태평양전쟁을 조국 광복의 기회로 여겼다면 2세들은 '미-일 전쟁'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조국은 미국이었고 조선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국이었다. 한인 청년들 다수가 미군에 입대한 건 자신이 사는 삶의 터전인 미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하와이에서 광복절을 맞는다. 서울에서라면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걸린 태극기들을 보거나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특별다큐멘터리를 보며 아 광복절이구나 했을 텐데, 하와이에서는 어쩐지 감흥이 다르다. 새삼스레 진주만기념관도 방문하고 일본인격리수용소가 있던 호노울리울리에도 가본다. 그렇다. 하와이에는 진주만이 있다. 미주리호도 있다.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9월2일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전함 미주리호에서 거행됐다. 한국전쟁에도 참여했던 그 미주리호가 지금은 진주만으로 돌아와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태평양전쟁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는 곳, 파도와 바람과 서핑과 노을 사이로 전쟁과 평화의 이야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하와이에서 조금은 새롭고 낯선 광복절을 맞는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여러모로 2차대전의 새로운 전기가 된다. 유럽의 전쟁을 관망하던 미국이 기습 공격을 당하고 본격 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선은 태평양 지역으로 확대된다. 2차대전의 또 하나의 축인 태평양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전세계가 전장이 되는 계기가 진주만 공습이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건 미국과의 협상을 유도하려는 전략이었다. 1941년 미국은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으며 미국 내 일본 재산을 동결했다.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로 전쟁을 확대하는 일본에 대한 경고였다.

미국으로부터 석유의 80%를 수입하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전함도 전투기도 석유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가 봉쇄당하자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필요한 자원을 충당할 계획을 세운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틈을 이용해 일본은 프랑스 식민지이던 인도차이나를 점유한 터였다. 석유와 고무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면 전쟁 자원을 충분히 획득할 수 있을 것이고 네덜란드 또한 이미 동맹국 독일군이 진주한 뒤라 문제될 것도 없었다. 태평양에서 미 해군이 무력화하면 미국 또한 협상에 나설 것이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는 선제기습공격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본 군부의 논리였다. 정치적 판단을 할 내각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파파야를 따서 아침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내가 차고의 지붕 위에 올라가 노랗게 익은 과일을 따려고 하자 비행기는 나를 향하여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닭장에서 계란을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 힐러 공군기지에서 연기가 치솟아 유칼리나무 숲을 휩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카메하메아의 킹 고속도로에 기총소사를 퍼부어 내가 서 있던 길 건넛집 유리창을 박살냈다.”(<하와이 한인 이민 1세>, 2003년, 도서출판 들녘)

이 생생한 증언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조선 사람이다. 진주만이 폭격당할 당시 하와이에는 원주민과 백인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 필리핀인 푸에르토리코인 포르투갈인, 그 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아시아계 대다수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과 그 후손이었다. 진주만 폭격은 다민족 사회구성체에 큰 균열을 냈다. 2000명 넘는 사상자가 나고 전함이 침몰하고 비행기가 불타고 공항이 마비되는 등 전쟁터로 변한 하와이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정이 실시됐다. 통행금지, 등화관제, 언론 검열이 시작됐다.

일본인을 적으로 규정하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도 공포됐다. 1885년 이후 노동이민 와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국적이 미국인 일본인조차 하루아침에 ‘적’으로 규정됐다. 여기에는 ‘니하우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 진주만 폭격 당시 니하우섬에 불시착한 일본인 조종사를 일본계 주민이 도와주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내 여론은 들끓었다. 영토를 침범당한 공포와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가 더해지면서 일본계 미국인을 격리수용하라는 여론이 높아졌고 행정명령 9066이 시행된다. 미국 거주 일본인을 비롯한 적성국 국민을 강제 수용하거나 추방할 수 있도록 한 이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 살던 10만명 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로 수용소로 보내져 억류당한다. 문제는 한인들이었다.

하와이의 군법무관과 이민국은 한인 1세들을 일본 신민으로 간주해 적국 국민으로 분류한다고 결정했다. 한인들은 거세게 반발하면서 즉각 대응했다. 재미통합조선위원회를 조직해 계엄당국과 교섭을 시도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본인으로 분류되는 점을 참을 수 없었다. 사실 하와이 이민자들은 독립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 번 돈을 기꺼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냈다. 안중근 의사 변호비용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대조선국민군단이라는 군사교육단체를 만들어 군사훈련을 추진하기도 했다. 끈질긴 교섭과 설득을 통해 하와이 계엄당국도 적국 거류민에 관한 법령들을 한인들에게는 그렇게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격리수용도 하지 않았다. 한인 이주민들은 일본인 이주민들이 일할 수 없게 된 몇몇 분야에서 일하게 됐다. 그럼에도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한인 이민 1세들은 공식적으로는 적성국 주민으로 분류돼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에 비해 하와이에서 태어난 한인 이민 2세대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미국 시민이었다. 한인 1세들이 태평양전쟁을 조국 광복의 기회로 여겼다면 2세들은 ‘미-일 전쟁’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조국은 미국이었고 조선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국이었다. 한인 청년들 다수가 미군에 입대한 건 자신이 사는 삶의 터전인 미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일본이민자 2세대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나고 자라 자신을 미국인으로 정체화하고 있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적성국민으로 분류돼 차별과 폭력, 격리를 당했다. 젊은 일본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미국임을 입증하는 길을 찾았고, 그중 하나가 군입대였다. 442연대는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민 2세들만으로 구성돼 2세 부대, 일본어로 니세이부대라고도 불렸던 442연대 전투단은 미 육군에서 활동 기간에 비해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였다. 이말인즉슨 부상자와 사상자가 수없이 나왔다는 것이리라.

호노울리울리의 일본인강제수용소 터는 문이 닫혀 있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국가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방문할 수는 없었다. 돌아오는 길, ‘국가란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한다. 나를 규정하는 자들은 누구인가에 관해서도 생각한다. 국가와 개인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갈등할 때 부서지는 쪽은? 광복이란 단어 안에 겹겹이 첩첩이 쌓인 이야기를 알아갈 때 문득 낯설다. 얼마나 짙은 어둠과 안개와 비바람과 구름을 뚫고 나에게 도달한 한 줄기 빛인가. 광복,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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