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로드맵이 필요하다

한겨레 2022. 8. 1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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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읽기] 황필규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며칠 전 법무부가 주관하는 유엔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PR) 국가보고서 간담회에 참석했다. 유엔 정례인권검토는 유엔인권이사회가 모든 회원국을 대상으로 약 5년 주기로 전반적인 인권 상황을 검토하고 권고하는 절차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국내 인권 전반에 관한 정부의 공식 입장을 들을 수 있는 첫 자리였기에 기대가 컸다.

유엔인권메커니즘에서의 심의와 권고는 ‘대한민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협의의 ‘행정부’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유엔인권기구의 심의 준비, 권고 이행 과정에서 입법부와 사법부의 참여는 필수다. 이는 정례인권검토 국가보고서 작성지침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마련된 초안도 과거와 다르지 않은 행정부 보고서에 그쳤다. 인권보호를 위해 모든 국가 전체 공적 기구의 역할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다.

거의 10년 가까이 간헐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다 드디어 지난해 12월 인권정책기본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그런데 정부는 보고서에서 이 법안이 인권정책에 관한 법이며, 법 제정을 위해 국회의 논의를 지원할 예정이라는 점만을 서술하고 있다. 정부 부처의 인권정책책임관 지정, 국제인권기구 권고의 이행, 기업의 인권존중 책임 등 그 핵심 내용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책임지고 법안 통과를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가 표명돼야 한다.

간담회에 제시된 국가보고서 초안은 실망 그 자체였다. 인권 현실이나 직면한 과제에 관한 제시 없이 정부 부처들의 진행 업무를 기계적으로 나열하는 예전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예컨대, 해외원조 사업으로 인한 대규모 인명피해, 인권침해가 보고되고 있는데도 “개발 사업에 영향을 받는 모든 지역사회의 효과적 참여를 보장”하는 권고에 관한 이런저런 계획들은 제시했지만, 지역사회 참여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보장할지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심사가 장기간 지연되면서 난민신청자들이 심각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데도 ‘난민심사 전담인력 증원으로 난민심사 장기화를 방지해 난민신청자들에게 신속한 보호를 제공하고 있다’는 등의 사실과 다른 서술도 여럿 눈에 띄었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는 제4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에 관한 권고를 제시했다. 법무부 주도로 공청회 등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올해 말~내년 초면 기본계획이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다른 소위 ‘기본계획’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도 큰 관심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그동안 선례를 보면 여러 정부 부처에서 내용상으로나 절차적으로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매우 추상적이고 타협적으로 기본계획이 작성됐다. 하지만 대통령이나 장관의 의지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전개도 가능하다. 지난번 계획 수립 때 10회가 넘는 인권단체 간담회를 통한 의견수렴은 한계점도 있었지만 의미가 컸다.

새 정부 출범 뒤 석달이 지났는데 인권정책 방향과 내용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국정과제에 관련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복지와 안전 관련 내용이 일부 있을 뿐이다. 지난 정부가 국가인권위를 중심으로 뭔가 되겠지 하면서 지켜봤다면, 현 정부는 국가인권위 역할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법무부의 경우 대통령 업무보고 내용만 보면 범죄피해자, 이주외국인, 수용시설 수용자 인권 정도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시민사회와 소통하며 인권문제를 고민해야 할 대통령실 담당자들은 시민사회를 적대시하거나 훈계하려 드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인권 로드맵이 필요하다. 기존 혹은 신설될 관련 조직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인권보호에 기여해야 하는지, 인권정책의 주된 방향과 내용은 어떻게 돼야 하는지에 관한 대통령과 범정부 차원의 고민과 결단이 필요하다. 인권은 어렵지 않다. 따뜻한 시선,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세, 공감하며 다가가려는 마음, 그리고 필요할 때 나서서 인권을 얘기하는 용기만 있으면 된다.

권력자는 의사결정을 하고 관련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의도와 무관하게 권력자의 정책은 수많은 이들의 인권에 직접적인 영항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제 대통령 임기 이십분의 일이 지났을 뿐이다. 인권의 길이 앞에 놓여 있다. 여기서 할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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