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여행] 잘 가꾼 연구소 하나, 열 수목원 안 부럽다
무릇 연구소라 하면 흰 가운을 걸치고 신중하게 실험도구를 다루는 연구원이 먼저 떠오른다. 각진 건물에 높은 담장도 자연스레 연상된다. 나주에 위치한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는 이런 편견을 단번에 허무는 시설이다. 당연히 산림자원의 보전·관리, 생물다양성 연구, 산림자원을 활용한 산업화 연구, 임업인 전문교육 등이 주요 업무지만 일반인에게는 잘 가꾼 정원이자 사진 찍기 좋은 여행지다.
연구소 정문으로 들어서면 일직선의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시선을 잡는다. 완만한 오르막길 양편에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가 산자락까지 이어진다. 굴곡 없이 460m가량 쭉 뻗은 길이니 소실점까지 저절로 기하학적 선과 면이 형성된다. 봄에는 파릇파릇한 새순이, 여름에는 녹음과 어우러진 맥문동이, 가을에는 불그스름한 나뭇잎과 낙엽이, 겨울에는 눈 내리는 풍경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니 사계절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색과 산책을 즐기려는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인생사진을 남기려는 여행객의 발길도 꾸준히 늘고 있다.
메타세쿼이아길과 쌍벽을 이루는 향나무길은 SNS에 익숙한 젊은 층이 특히 많이 찾는다. 둥글둥글하게 다듬은 향나무와 이보다 조금 키가 큰 연필향나무, 서양에서 기하학적 정원을 꾸밀 때 심는 에메랄드그린이 일직선 도로 양편으로 가지런하게 도열해 있다. 길 끝에는 나주혁신도시의 고층빌딩이 신기루처럼 걸려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덕분에 ‘구미호외전’ ‘프레지던트’ ‘1박2일’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광고,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하기도 했다.
연구소는 1922년 광주 쌍촌동에 임업묘포장으로 문을 열어 임업시험장으로 승격한 뒤, 1975년 나주로 이전했다. 메타세쿼이아는 그때 심었으니 수령 50년 안팎이다. 이 숲길을 중심으로 상록원, 약용식물원, 소나무원, 화목원, 다래원, 매실원 등 다양한 주제의 숲과 아기자기한 정원이 조성돼 있다. 식산 아래 드넓은 부지에 금송, 은청가문비나무, 들메나무, 꽝꽝나무, 푸조나무, 붉가시나무 등 희귀 수종과 난대·아열대에서 자라는 500여 종 1만4,000여 그루의 나무가 울창한 숲을 형성하고 있다.
“숲의 나이 40~50년은 사람으로 치면 청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태계가 안정된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풀과 나무가 조화를 이룬 숲에는 다양한 동물도 함께 서식하고 있습니다. 청설모와 다람쥐는 흔히 볼 수 있고, 천연기념물인 담비와 팔색조, 하늘다람쥐도 목격됩니다. 개울에는 두꺼비 도롱뇽 개구리가 살고 있어 생태 체험장으로 제격이죠. 유아와 학생은 물론이고 일반 단체에서도 많이 찾아옵니다.” 정보미 복지환경연구팀장의 설명이다. 평지 숲이어서 누구나 무리 없이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방문객이 늘어나자 연구소는 무료로 진행하는 숲 해설 프로그램과 함께 ‘빛가람 치유의 숲’을 운영하고 있다. 산림치유센터에서 측정 장비를 활용해 몸 상태를 확인한 뒤, 연령과 성별, 날씨에 맞게 꽃차 마시기, 명상 호흡과 춤, 소리 치유, 아로마테라피 등을 진행한다. 2~3시간이 소요되고 1인 참가비는 5,000원이다. 산림치유사와 상담 후 진행하기 때문에 전화 예약(061-338-4255)이 필수다.
연구소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는 5시)까지 무료로 개방하지만, 음료 외에 일체의 음식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제한 없이 개방하던 시절, 솥 단지를 걸고 고기를 굽는 사람도 있었고 화장실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쓰레기가 넘쳤다고 한다. 무엇보다 외래 식물의 생태계 교란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산림자원연구소에서 뒤편 식산(291m)으로 등산로가 연결돼 있다. 정상에 오르면 나주혁신도시를 비롯해 영산강 주변 나주평야까지 시원하게 조망된다. 조선의 모든 군사가 사흘 먹을 정도로 물산이 넘친다는 의미를 지닌 산인데, 아무래도 이곳에서 보는 풍성한 들판 때문인 듯하다. 높지 않지만 꽤 가파르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느긋하게 올라야 할 산이다.
나주=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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