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절망·비탄·경이..1인16역 무대 선 김지현 "제 심장도 함께 뜁니다"  

선명수 기자 입력 2022. 8. 16. 11:24 수정 2022. 8. 1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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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무대 서는 배우 김지현
뇌사자 장기이식 24시간 다룬 작품..100분간 홀로 16역 연기
"1인극 매력 빠져..단언하기보다 질문 던지는 것이 이 작품 미덕"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뇌사 상태에 빠진 한 청년의 장기이식을 둘러싼 24시간을 그린 1인극이다. 배우 김지현은 이 공연에서 ‘서술자’를 포함해 16명의 인물을 연기한다. 프로젝트그룹 일다 제공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에는 딱히 주인공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암전 속, 규칙적인 심장의 박동 소리로 시작하는 연극은 심장 주인의 사망과 이 심장이 타인의 몸으로 이식돼 “여명을 알리는, 최초의 박동”을 하기까지 24시간을 그린다. 굳이 따진다면 심장이 극의 주인공인 셈인데, 심장이식을 둘러싼 인물 모두를 단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

혹한의 새벽 파도에 올라타며 심장의 터질 듯한 박동과 생의 환희를 만끽하는 열아홉 청년 시몽 랭브르, 서핑을 마친 후 교통사고를 당한 시몽의 뇌사를 판정한 의사, 아들의 죽음 앞에서 장기이식을 결정해야 하는 시몽의 부모,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집도의와 심장 수혜자까지. 탁자 하나만 놓인 단출한 무대에서 배우는 이 모든 인물이 감각하는 기쁨과 환희, 절망과 비탄, 애도와 경이의 순간을 빚어낸다.

서술자가 심장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며, 그 심장이 기록해온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독특한 연극에서 배우 김지현(40)은 홀로 16명을 연기하며 100분간 무대를 이끈다. 김지현은 e메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초연 때 이 공연을 보고 참 멋진 1인극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제작사에서 연락을 받은 순간 이미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2019년 초연했고 올해가 세 번째 무대다. 초·재연에 출연했던 손상규, 윤나무 외에 올해는 김지현, 김신록 등 여성 배우 2명도 번갈아 무대에 선다. “관객에게 작품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담담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전달하는 연출 방식도, 그걸 수행하는 배우도 참 멋진 연극이에요. 1인극이라는 점에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물론 대본을 받은 이후엔 공포심에 소름이 돋기도 했어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에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 바이브액터스 제공

2004년 데뷔 후 수많은 무대를 경험해온 19년차 배우지만, 그는 처음 서는 1인극에 “첫 공연 때는 정말 흰 수건을 던지고 기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적이고 은유적인 대사에, 수많은 의학 용어도 더해지는 이 공연에서 배우가 외워야 할 대사 분량은 A4용지 36장에 달한다. 김지현은 “이 무대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관객이 공연 내내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 등 첫 무대에선 너무 많은 생각과 의심과 공포에 사로잡혔다”면서도 “두 번째 공연부터는 ‘아 이제 괜찮다,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고 관객분들과 함께 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속으로 관객분들을 더 깊이 초대하고, 끌어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마음이 무대에서 더 저를 자유롭게 해주더라고요. 관객의 모든 호흡을 무대에 선 저 혼자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점, 그게 1인극의 치명적인 매력인 것 같습니다.”

“관객의 모든 호흡, 홀로 오롯이 무대에서 느껴…정답 말하기보다 질문 던지는 연극”

배우 한 명이 전체 무대를 책임지는 1인극인 만큼 김지현은 한 장면 안에서도 여러 인물을 오가며 연기한다. 믿을 수 없는 아들의 사고 소식에 하얗게 질린 채 눈물을 흘리는 시몽의 엄마가 되었다가, 곧바로 그런 엄마에게 장기이식 과정을 침착하게 설명하는 코디네이터가 되기도 한다. 서술자와 여러 등장인물을 관객이 혼동하지 않도록 매끄럽게 오가야 하며, 그만큼 배우의 역량에 의해 공연의 완성도가 좌우되는 까다로운 작품이다.

김지현은 “서술자의 시각으로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자칫하면 관객들에게 고통의 시간이 될 수도 있기에, 각각의 인물을 잘 구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말했다. “목소리의 구분이나 말투, 에너지 등의 차이를 생각하면서 연습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소설을 찾아가게 되더라고요. 각각의 인물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인물의 외형이나 일차적인 표현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그를 이해하고 제 안에 단단히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의 한 장면. 프로젝트그룹 일다 제공

연극에서 심장은 한 인간의 생을 대변하는 장기이자 삶의 격정과 율동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육신의 블랙박스”다. 공연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숨진 청년의 심장이 타인의 몸으로 이식되는 급박한 24시간을 그리면서도 신파로 흐르거나, 관객에게 비통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파도처럼 닥쳐온 죽음이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순간, 그 여정을 놀랍도록 담담하게 풀어내는 연극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 삶의 생동과 경이를 이야기한다. 김지현도 이런 ‘담담함’을 작품의 미덕으로 꼽았다.

“이 연극은 인물들의 상황을 그저 툭툭 던져줍니다. 그래서 특별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생각의 장을 열어주는 작품이에요. 시몽의 심장을 만나는 여러 인물들, 그들의 심장이 뛰는 순간을 담담하고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보여주고, 그 속에서 ‘여러분의 심장이 뛰고 있는데, 어떤가요?’라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죠.”

“진부하지만, 나의 심장 뛰게 하는 것은 여전히 무대 위”

냉정할 만큼 침착한 톤을 유지하는 공연이지만, 그 안에서 재생되는 각각의 삶의 단편들은 때로는 기쁨과 환희,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저릿하게 다가온다. 청년 시몽이 겨울 파도에 도전하며 삶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첫사랑의 감정에 달뜬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김지현은 매혹적으로 연기한다. 김지현은 “시몽과 (첫사랑) 줄리엣이 처음으로 나란히 걷게 되었던 그날”의 이야기를 가장 뭉클한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시몽에게 마치 파도와도 같은 줄리엣과 그들의 첫 이야기, 저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있는 그 심장이 터질듯한 기억들…. 젊은 날의, 그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순간의 표현들이 참 눈물나게 아름다워요.”

시몽이 파도를 타며 환희로 고동치는 심장을 느꼈다면, 김지현에겐 그런 순간이 “무대 위에서 관객과 호흡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진부하지만, 다른 답을 찾을 수 없네요.” 지난 3월 종영한 드라마 <서른, 아홉> 등에 출연하며 무대에서 드라마와 영화로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그는 차기작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시즌2를 촬영하고 있다.

김지현은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라는 독특한 연극의 제목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고 했다. “많은 작품이 그렇지만 이 연극도 관객 각자의 느낌으로 닿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정답은 없잖아요. 어떤 답을 얘기하기보다는, 그저 삶의 많은 단편들을 열정적으로, 혹은 담담하게 보여드릴 뿐이죠.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이 극장을 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가 “당연하면서도, 묵직하다”고 표현한 극의 제목은 원작 소설 속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토마가 전율을 느낀 안톤 체호프의 희곡 <플라토노프>의 대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니콜라이?” “죽은 자들은 땅에 묻고 살아 있는 자들은 고쳐야지.”

공연은 서울 장충동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9월4일까지.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의 한 장면. 프로젝트그룹 일다 제공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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