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배운 등산이 무서워" 3년 만에 100명산 완등
'The whole mountain is covered with azalea(산 전체가 진달래로 덮여 있어요).'
박진경(47)씨의 블로그에서 대구 비슬산을 설명한 영어 한줄평이다. 등산 블로그(blog.naver.com/tonygina)를 운영 중인 그는 영어 교육 대학원을 나와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국가전문자격증인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영어)도 보유하고 있다. 그의 블로그는 자신이 다녀온 산을 영어 한줄평과 함께 소개하는 게 특징이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박진경씨는 늦게 배운 등산인이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불혹이 넘은 나이에 등산 마니아가 될 줄은 주위 사람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이제는 휴가나 연차 때마다 산 생각이 가장 먼저 난다는 그는 원래 등산에 관심이 하나도 없던 평범한 중년이었다.
"다시 내려올 산을 왜 힘들게 올라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한 번은 새해 첫 날 남편(김외철·경북도청 서울 본부장)이 청계산을 가자고 꼬드긴 적이 있었어요. 아이 셋을 데리고 올랐는데 너무 힘들고 추워서 남편한테 바가지만 왕창 긁고 내려왔죠."
부부싸움으로 가출했다 등산에 빠져
등산에 '등'자도 모르던 진경씨가 뒤늦게 산에 빠진 건 건 부부싸움 때문이었다.
"한번은 가사 문제로 남편과 다툰 적이 있어요. 일하면서 아이들 키우는 것도 힘든데 남편이 가사 일을 많이 도와주지 않았어요. 혼자서 장을 보고 두 손 무겁게 짐을 들고 있으니 화가 나더라고요. '니들끼리 알아서 잘 살아봐라'하고 친정집으로 떠났죠."
홧김에 집을 나갔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낮에는 몰래 집으로 돌아가 우렁각시처럼 집안일만 해놓고 나오기도 했다.
"집을 나와 있으니 마음이 답답하고 심심하기도 했어요. 마침 친정 엄마가 도봉산둘레길을 알려줘서 한번 가봤어요. 둘레길이라고 걸었는데 길이 점점 가팔라지고 바위가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길을 잘 못 든 거죠."
어쩌다보니 도봉산 마당바위까지 올랐다는 진경씨. 거기가 정상인 줄 알고 한숨 돌리려던 찰나, 주변 사람들이 정상이 아니라고 일러준다. 오기가 생긴 진경씨는 그길로 생애 처음 도봉산 정상까지 올랐다.
"정상에 가서 깜짝 놀랐어요. 해질녘 석양에 비친 도봉산 기암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한국에도 이렇게 멋진 곳이 있는지 전혀 몰랐죠."
등산초보의 100명산 도전
도봉산 경치에 반해 산에 빠진 진경씨는 북한산에서 처음 블랙야크 100명산 도전을 알게 되었다.
"산 정상에서 사람들이 뭔가 들고 사진을 찍더라고요. 알고 보니 100명산 인증하는 분들이었어요. 도전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산에 다니면서 내 기록을 남기는 게 좋아 보여 저도 시작하게 되었죠."
처음 등산을 다닐 때는 가족들이 마냥 좋아하지 않았다. 평생 산을 안 가본 사람이 갑자기 등산을 한다니 가족들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블로그 활동을 하며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는 엄마의 모습에 걱정은 점점 응원으로 바뀌어갔다. 경상북도청 서울본부 공무원인 남편은 경북 지역 산을 오를 때 함께 해줬고, 아이들도 가끔 엄마를 따라 산을 올랐다.
진경씨는 100명산 도전을 하며 새로운 친구도 만났다. 도전 초기에는 안내산악회를 이용해 혼자 산을 다녔지만 이내 산에서 자주 보던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산행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한번은 혼자 방태산에 갔다 길을 잃었어요. 어느 순간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길이 안 보이더라고요. 휴대폰 신호는 물론 GPS도 안 잡히는데 이러다 산에서 죽는구나 싶었죠."
산이 진경씨를 살려줬던 것일까. 무작정 걷다 보니 GPS 신호가 다시 잡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정체 모를 배관을 따라가니 민가가 나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현지인이 도와준 덕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방태산은 진경씨가 100명산 도전을 하며 유일하게 한 번에 인증하지 못한 산이 되었다. 당시에는 그 일에 충격을 받아 당분간 산에 갈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방태산을 잘 아는 분과 함께 정상에 올라 그때의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진경씨는 그 사건으로 산이 얼마나 위험한 곳이지 알게 되었고 이후로는 철저히 공부하고 겸손한 자세로 산에 오른다.
3년 걸려 100명산 완등
2019년 5월 청계산에서 처음 100명산 도전을 시작한 진경씨는 3년 만인 2022년 7월 16일, 칠갑산 정상에서 도전의 종지부를 찍었다.
"남들은 완등 전날 잠이 안 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안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전날 밤이 되니 저도 잠이 잘 안 오더라고요. 전역을 앞둔 군인들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고 하잖아요. 저도 혹시나 예기치 못한 일로 완등을 못 하게 될까봐 걱정이 들었어요."
우려와 달리 다음날 진경씨는 무사히 칠갑산 정상에 올랐다. 이날 산행에는 남편과 세 자녀, 그리고 산에서 만난 친구들이 함께 올라 진경씨의 완등을 축하했다.
"저는 엄마가 건강해야 가족도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스트레스나 걱정거리가 있어도 힘들게 산을 오르고 나면 다 잊혀지는 것 같아요. 가끔 가족과 함께 산을 오르며 집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나면 관계가 더 돈독해지기도 하고요."
100명산 완등은 진경씨에게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그의 목표는 앞으로 계속 산을 다니며 전국의 아름다운 산을 자신의 블로그에 소개하는 것이다.
"산은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에게 늘 겸손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럴 때 산이 보여 주는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듯해요. 어려움 속에서 이따금 산이 주는 아름다운 경험 때문에 산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월간산 2022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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