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운드 비결요? 맞기싫어서 더 죽어라 했습니다"

김종수 2022. 8. 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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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49)] '큰 까치' 조문주

 

 

“훈련도 열심히 하고 개인적인 승부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맞기 싫어서 더 치열하게 리바운드 쟁탈전을 벌였던 것 같아요. 경합에서 패하는 아쉬움 못지않게 이후 처벌도 두려웠으니까요. 지금 시선으로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때는 진짜 그랬습니다. 그냥 견디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굉장히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던 시절이었죠”


’큰 까치‘ 조문주(58‧180cm)는 1980년대 여자농구를 대표하던 빅맨중 한명이었다. 국민은행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소속팀을 강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체형은 호리호리했지만 몸싸움을 피하지않고 허슬플레이도 서슴치않는 등 투지넘치는 플레이어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기자는 조문주와의 인터뷰에서 ‘변화를 두려워 하지않고 받아들이는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다’는 부분을 느꼈다. 보통은 나이를 먹으면 바뀐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않다. 그녀는 달랐다. 본인의 신념도 있지만 더 좋은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실제로 나이를 먹고 깨닫게 된 부분도 많다고 한다. 선수들을 바라보는 시선, 재촉하지않는 법, 마음을 통한 교감 등 예전에는 미처 중요하게 돌아보지 못했던 방향에 눈을 뜨게됐다고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 많이 언급될 당시의 폭력 문화 역시 그런 의도에서다. 새삼스럽게 무엇인가를 폭로(?)하고 ‘우리 시대는 그렇게 힘들었어’라는 의미보다는 ‘더 좋은 방향이 있었을텐데’, ‘당장의 결과보다 더 심각한 후유증’ 등 잘못된 것에 대한 개선방향과 인식전환에 대한 경각심의 취지가 크다.


“오랜만에 하는 인터뷰인데 저도 좋은 말만하고 민감한 부분은 피해가면 편하죠. 그 시절 다 그랬는데 새삼스럽게 해묵은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거에요. 하지만 변화를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것이든 나쁜것이든간에 말이에요. 쉬쉬할 사안도 아니고, 그 시절 그런 방식이 선수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으며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최선이었냐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조문주를 이어 국민은행을 이끌어갔던 후배 이강희, 박현숙은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지금도 각별하다. 이강희는 “키가 월등히 큰 센터가 아님에도 포스트 플레이를 무척 잘했고 자신보다 큰 상대와의 몸싸움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후배들을 잘 챙겨주던 기억이 난다. 농구 기술적인 부분이나 인성 등 흠잡을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박현숙 또한 “언니는 지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강한 승부욕의 소유자였다.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지않고 그만큼 성실하게 훈련했던지라 옆에서 보고 배울게 많았다. 늘 기도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하다”는 말로 코트안팎에서의 한결같음을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선수는 물론 한 인간으로서도 많은 후배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서히 예전 선수로 잊혀져가던 조문주는 최근 농구를 하는 막내딸 고현지(181cm)로 인해 다시금 유명세를 타고 있다. 고현지가 속한 수피아여고는 지난 9일 강원도 양구 문화체육회관서 있었던 2022 한국중고농구 주말리그 왕중왕전 여고부 결승전에서 수원여고를 81-73으로 물리치고 시즌 첫 우승 및 3년만의 정상탈환에 성공했다.


이날 경기에서 24득점, 12리바운드, 3어시스트, 2스틸, 3블록슛으로 맹활약한 고현지는 MVP까지 차지하며 다시 한번 한국 여자농구의 미래임을 알렸다. 팀사정상 빅맨포지션을 맡고있지만 다양한 테크닉에 기동성까지 겸비한지라 장신가드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는 왕년의 조문주가 아닌 고현지 엄마로 불리고 싶다’는 농구인 조문주를 만나 그녀의 성장형 농구 철학과 그 시절 얘기를 들어보았다.

 

 



“이제껏 해온 농구와는 다른 방향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하이파이브 스포츠클럽이라는 곳에서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동아리 농구를 가르치고 있어요. 젊고 잘생긴 남자 선생님이 하면 더 좋을텐데 아쉽게도 할머니에게 농구를 배우고 있는지라 학생들 입장에서는 좀 아쉬울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그래도 나름 서로 웃고 떠들면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행여라도 세대 차이의 벽이 클까 봐 최대한 거리를 좁혀보려고 농구뿐 아니라 족구, 피구 등도 함께 가르치고 수건돌리기도 하면서 기술이 아닌 즐기는데 초점을 두고 있어요. 다행히 아이들이 좋아라해서 저도 기분 좋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과 달라요. 개성도 강하고 하나하나 색깔이 풍부해요. 과거 생각만 하다가는 거리를 좁히기 힘들죠. 거기에 섞이려면 제가 맞춰야되요. 1시간 30분 정도 수업한다 치면 30분은 농구 외적으로 즐길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오히려 엘리트 선수들 가르치는 것보다 더 힘들 것 같아요.
그건 아니에요. 분명 이것저것 신경 쓸 부분은 더 많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마음은 현재가 훨씬 편해요. 뭐랄까 삼천포여고 있을 때는 여유가 없었어요. 엘리트 선수들이다 보니까 최종 목표는 프로선수잖아요. 그러다 보니 팀 성적 신경 써야지, 개인 기량 끌어올려 줘야지. 그런 무거운 책무에 짓눌리다 보니 즐기고 소통한다? 그런 것은 꿈도 못 꿨죠.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소통은 커녕 일방적으로 나를 따르라는 통제의 연속이었던 듯 싶어요. 저도 그렇고 선수들도 결코 즐겁지 않았겠죠. 제가 되게 싫은 선수도 많았을거에요. 어떤 선수는 저를 ‘악마같다’고도 표현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어떻게 하면 성적이 나올까?’가 아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가 주가 되다 보니 저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다릅니다. 왕년에 농구 좀 했던 편한 할머니, 큰엄마 정도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요.

Q.말씀하셨다시피 엘리트 스포츠의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그동안은 그렇다고 생각했었죠. 한데 아니더라고요. 언젠가부터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 그렇게 단정 짓고 다른 방향에 대해서는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을요. 수피아여고 김명희 감독이 U16, U17 대표팀을 맡으면서 해당 학교 농구팀에 두달 정도 공백이 생겼어요. 제가 잠시 대타로 가게 됐죠. 짧은 시간만 봐주면 되는거라서 성적에 대한 부담감 그런 것은 없었어요. 대신 해당 기간 동안 아이들과 잘 지내면서 뭐라도 하나 남겨놓고 가고 싶은 마음은 강했습니다. 정말 신기하죠. 달라진 마음으로 학생들을 쳐다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Q.예를 들면 어떤 것들…
스킬트레이닝 해주듯 한명한명 코칭해주는 것은 물론 소통과 교감의 중요성도 뼈저리게 느꼈어요. 김 감독은 성적 때문에라도 엄하게 이끌어가야 하는 부분이 많았을거에요. 그러다 보니 가깝게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는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고요. 저같은 경우는 농구 외적인 얘기도 들어주면서 수시로 껴안고 사랑해라는 말도 서슴치 않고 했어요. 아무래도 임시 감독이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러한 과정에서 아이들의 웃는 얼굴, 확 좁혀진 거리감 등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다시 클럽으로 돌아온 후에도 보고 싶다고 연락하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칭찬과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더불어 ‘삼천포여고 시절에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후회도 함께요. 무엇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아, 이런 방향도 있었는데…’에 대한 깨달음이 컸죠. ‘여유 따위는 전혀 없이 너무 한 곳만 봤구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


Q.의미심장한 말씀이지만 여전히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거죠?
그렇습니다. 쉽지 않죠. 특히 엘리트 스포츠를 예로 들면 가르치는 지도자들이나 배우는 학생들이나 그렇게 운동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국내 엘리트 스포츠같은 경우 경쟁이 워낙 치열하잖아요. 뭐랄까 늘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되는지라 혼내지 않아야 될 상황에서도 혼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근성, 승부욕, 투지 이런 것을 만드는 과정의 상당수가 긴장감을 통해서 이뤄졌으니까요. 즐기면서 농구를 하면 좋죠. 지도자도 학생도 이상적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일단 성적이 나야하잖아요. 성적이 나지 않으면 당장 지도자는 짤려요. 방금 제가 언급한 것처럼 다른 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당장의 성적을 위해서는 윽박지르고 밀어붙이는게 최고죠.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체벌이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Q.지도자도 지도자지만 학생들 역시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 있을 듯 싶어요.
맞습니다. 이미 익숙한 케이스가 태반일거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 식으로 운동을 해왔어요. 스스로 즐기면서 자율적으로 하기보다는 엄한 분위기에서 강한 훈련량을 요구받고 그것을 이기면서 성장해왔거든요. 그러한 주입식 스타일에 몸과 마음이 배여 있는데 갑자기 자율적으로 바뀐다? 적응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일부에서는 그것을 역이용하는 케이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한쪽이 아닌 지도자와 학생이 함께 바뀌는게 최상이지만 당장은 힘든게 현실입니다. 슬픈 일이죠.

“귀싸대기 한방에 고막이 터져버렸습니다”

Q.지금도 이럴진데 예전 농구대잔치 시절 선수들 같은 경우는 억압과 체벌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었겠죠?

그렇죠. 훈련량도 그렇지만 그것은 서로 잘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도 있어요. 그 시절 선수들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게 엄청난 훈련을 받고도 또 따로 개인 연습까지 하는 선수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처럼 다양한 스킬과 전략 전술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음에도 국제대회에서 나름 선전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체벌같은 경우는 시대 보정을 한다 해도 이해되지도, 이해를 하고 싶지도 않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지더라고요. 그때는 여자선수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그래도 여자인데 엄한 말로 좀 혼내고 기합 좀 받는 정도 아니였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남자선수들이 어느 정도의 체벌과 가혹행위를 당했는지는 직접적으로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여자선수들 또한 견디기 힘든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Q.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듯 싶군요?
그럼요. 그래도 나름 운동선수잖아요. 학창시절 내내 혹독한 훈련을 겪다 보면 몸과 마음도 보통의 친구들보다는 훨씬 강하죠. 그런 선수들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주눅들게 만들 수준의 폭력입니다.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말을 보다 더 잘 듣게 하기 위해서는 더더더 강한 폭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죠. 학창시절은 물론이거니와 실업 시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임영보 감독님에게 귀싸대기를 맞은 적이 있어요. 정말 아팠지만 뭐 한 두번 맞은 것도 아니고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욕 듣고 맞는 것은 일상 생활이었거든요. 문제는 이후에 자꾸 귀에서 윙하는 소리가 들리는 등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혼자 이비인후과를 방문했는데 고막이 터졌으니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래서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수술했다는 것 아니에요. 나중에 부모님이 뒤늦게 알아가지고 임감독님한테 찾아가 항의를 하고 저는 외삼촌 집에서 한동안 감금되다시피 하면서 잠시 쉬웠던 기억도 나요. 어쨌든 그일 이후에는 그래도 안 때리시더라고요.

Q.그렇게 때렸던 그분과 지금도 연락은 하고 지내시나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연락은 하고 지냅니다. 그런 선수들 많아요. 선수 시절에 그렇게 맞고도 그러려니 하고 예전 감독님하고 안부 정도는 나누는…, 뭐 이제는 같이 나이 먹어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다들 성격 좋은 거죠. 제가 생각해도 당시 선수들 참 착해요. 그렇지않아도 오늘 오전에도 통화했어요. 지금은 80살이 넘으셔서 그래도 많이 유해지셨죠. 통화 중에 ‘문주야, ㅇㅇ이가 보고싶구나. 그 녀석에게 연락 좀 해봐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순간 제가 웃으면서 말했어요. ‘ㅇㅇ언니요? 왜 보고 싶은지 알겠네요. 감독님이 그 언니 오죽 많이 때렸어요. 그래서 더 보고 싶은거에요?’물었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선수들이 감독님에게 정말 많이 맞았지만 그 언니는 특히 그랬거든요. 옆에서 보기 불쌍할 정도였어요. 늦게나마 미안해서 그러시는지 아님 그냥 순수하게 궁금한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폭력의 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ㅇㅇ언니에게 말은 꺼내볼께요. 어쨌거나 감독님 지금 같으면 깜빵을 가도 몇 번은 가셨을거에요’라고 말했습니다.(웃음)

 

 


Q.폭력도 대물림이라고 하잖아요. 많이 맞으면서 선수 생활을 했던지라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있는 부분은 없으셨나요?
솔직히 전혀 없다고는 말 못하겠죠. 저를 천사로 포장하고 싶지도 않고요. 좀 전에도 말했잖아요. 저를 악마라고 표현하는 선수도 있었다고. 지도자로 있다 보면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선수, 뭐라고 하면 주눅 들어서 더 못하는 선수, 혼 좀 내면 더 잘할 것 같은 선수 등 딱 보이는 부분이 있어요. 때문에 특정 선수에 대해서 좀 더 혼내고 그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뺨을 때린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은 못하겠더라고요. 해서도 안되지만 하지도 못합니다. 대신 상황에 따라서 호통을 많이 치거나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는 편인지라 선수들 중에는 저를 맹장으로 보는 케이스도 적지 않아도 들었습니다.(웃음)

 

 

 


“현지는 지금은 빅맨이지만 가드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Q.최근 막내딸 고현지양의 활약이 뜨겁더라고요.

그러게요. 요새 살짝 주목받고 있기는 하죠.(웃음) 제가 종종 현지에게 ‘현지야, 나는 조문주 딸 고현지보다 고현지 엄마 조문주로 불리는 것을 원한다. 너는 너일 뿐이니까 열심히 꿈을 펼치고 잘되어서 엄마 이름을 덮어버려’라고 말해요. 부모 입장에서도 그게 더 좋은 것이기도 하고요. 다른 종목과 달리 농구가 2세 선수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에요. 재능도 재능이지만 일단 어느 정도 신체조건이 따라줘야 하는 스포츠니까요. 농구 했던 부모에게서 나온 자녀들은 신장 등에서 평균 이상을 갖출 확률이 높아요.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농구하고 인연을 많이 맺거든요.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의외로 2세 중에서 빛을 보는 케이스가 드물더라고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특히 부모가 선수 시절 이름 좀 날렸던 2세들은 알게 모르게 심리적인 압박이 상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인은 조용히 농구를 하고 싶어도 자꾸 부모님 이름이 거론되면서 비교되고 그럴 테니까요. 저희 딸도 표현은 하지 않지만 그런 스트레스도 많았을 것이다고 짐작만 합니다. 잘 이겨내고 부모보다 훨씬 나은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를 소망합니다.

Q.엄마 고등학교 시절과 비교해서 기량은 어떤 것 같아요?
저보다 낫죠. 저는 말 그대로 토종센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현지는 정말 다재다능하거든요. 현역 시절 제 소원이 경기 중에 3점슛 한번 던져보는 것이었어요. 특별히 슛감이 좋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찬스가 나도 안 던지는 것과 못 던지는 것은 천지차이거든요. 뭐 일단은 쏴봤어야 제가 슛감이 어떤 선수인지 파악이라도 되죠. 저희 때는 센터가 페인트 존 근처를 벗어나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외곽에 공간이 비어도 그쪽은 쳐다봐서도 안되요. 스크린이나 걸고 리바운드 할 생각해야지 행여나 3점슛 시도라도 했다가는 미쳤다는 소리 들어요. 벤치로 들어와서 욕은 기본이고 경기 끝나고 엄청 맞았을걸요. 경기중에는 물론 훈련 때도 안되요. 장난으로라도 몇 개 던져봤다가는 바로 귀싸대기나 원투펀치가 날아올 테니까요. 슛은 커녕 드리블 연습도 거의 안 했어요. 그냥 우직하게 골밑에서 비비는 역할만 요구됐어요. 창조적인 플레이보다 그냥 내 말만 잘 들으면 된다는 당시 감독님들의 지도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같아요. 임의로 시키지 않은 플레이를 하게 되면 설사 결과가 좋아도 감독님은 소위 빡칠 수밖에 없었겠죠. 반면 현지는 현재 포지션은 센터지만 가드, 포워드까지 모두 가능해요. 활용도는 물론 성장 가능성도 높죠. 엄마를 떠나서 농구 선배로서 부럽기도 해요.

Q.가드 전향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빅맨치고 다재다능하다는 뜻이겠죠?
본래 중학교 때까지 가드를 봤어요. 그러다가 수피아여고로 전학을 가면서 거기서 센터를 보게 된 것이죠. 현지에게 가드라는 포지션은 낯설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앞선에서 플레이하는게 더 익숙한지라 최종적으로 앞선이 맞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감독님도 ‘우선은 팀 사정상 빅맨을 보고 있지만 중3짜리 장신 자원이 후배로 들어올 예정인지라 내년부터는 앞선으로 뺄 것이다’고 말하더라고요. 가드가 좋다. 센터가 나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본인이 더 자신있어 하고 잘하는 포지션으로 간다는 개념이죠. 현재 고2인지라 앞으로 좀 더 키가 클 여지도 있다고 보는데 기량만 꾸준히 갈고 닦는다면 장신가드로서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일단 현재로서도 현역 시절 저보다는 큽니다.

Q.고현지양은 어떻게 농구를 시작하게 된 것인가요?
딱히 농구를 시킬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 우연하게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된거죠. 현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WKBL에서 전국 유소년들을 대상으로 강원도에서 농구 캠프를 했어요. 제가 거기에 강사로 가게 됐는데 당시 어린 현지를 집에 놔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당시 삼천포초등학교 감독으로 있던 지인에게 부탁해서 현지를 거기 농구부 선수로 등록시켰죠. 현지를 현장으로 데려가야 하니까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는데 현지는 달랐나 봐요. 생전 농구를 해보지도 않았음에도 현장 분위기 등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이후 삼천포초등학교 농구부에서 합숙을 하고 싶다고 하기에 그럼 그래봐라 했더니 3일 만에 ‘엄마, 나 여기서 농구 할거야’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전학을 시켰고 엄마와 떨어져서 그곳에서 농구를 하게 됐죠. 그게 시작이었어요.

 

 

 

Q.고현지양이 막내로 알고있는데 혹시 위에 두 언니도 농구를 했나요?
아니요. 시키지 않았어요. 시킬 생각도 없었고요. 제가 힘들게 농구를 해서 자식은 시키기 싫다 그런 개념이 아닌 그냥 일부러 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거에요. 자기 인생 자기가 찾아간다고 본인과 인연, 적성 등이 맞는 곳으로 가기를 바랬습니다. 요새 현지가 너무 잘해버리니까 ‘위에 언니 둘이 아깝지 않냐?’는 질문도 종종 받아요. 아니요.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운동은 재능도 중요하지만 본인이 간절히 원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봐요. 현지야 스스로 한다고 했으니까 시켰을 뿐 언니들은 다르죠. 다만 큰아이가 최근에 ‘엄마 왜 나 농구 안시켰어? 내가 농구 했으면 현지보다 더 잘할 자신 있는데’라고 장난스럽게 말하기는 하더라고요. 첫째가 175cm, 둘째가 173cm정도 되는데 만약 농구를 했으면 더 컸겠죠. ‘혹시 이 녀석들이 농구를 했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였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쉬움보다는 말 그대로 순수한 궁금증일 뿐입니다. 첫째는 고등학교 때 유학가서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둘째는 강원대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들어가려고 공부 중에 있어요. 각자 자신의 자리를 잘 찾아가고 있는 듯 싶어요.

Q.당시 센터 조문주는 빅맨으로서 사이즈적인 경쟁력은 어땠나요?
당시 180cm면 작은 편은 아니었어요. 저도 제가 작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문제는 상대 팀에 저보다 사이즈가 월등한 빅맨들이 있었고 그 선수들을 제가 수비해야 된다는 사실이었죠. 박찬숙(190cm) 언니는 사이즈와 기량을 겸비한 최고의 선수였고, 김영희(205cm) 언니나 국제대회에서 마주치게 되는 정하이샤(204cm) 등을 상대할 때는 많이 버거웠습니다. 최근 추세는 센터도 외곽슛을 던지고 페이스업을 하는 등 자신의 성향에 맞는 스킬을 추가하잖아요. 차라리 그랬으면 뭔가 좀 더 좋은 승부가 되었을 텐데 이른바 체급 차이가 나는 상태에서 오직 골밑에서만 막으려니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나마 공격할 때는 미들슛을 무기화시키기 위해서 꽤 연습했던 기억이 나요. 경쟁자들에 비해서 체격 조건이 좋지도 못한데 마르기까지 해서 공격시 매번 포스트업을 치고 몸싸움하면서 힘으로 우겨 넣기는 힘들잖아요. 프리드로우 라인하고 3점슛 라인 중간지점 쯤에서 던지는 연습을 많이 했어요. 당시 매니저 언니가 앞에다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있는거에요. 그럼 저는 그 위로 쏘는 연습을 했습니다.

 

 


“사랑의 매? 절대 아닙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저는 원래 초등학교 때 육상을 했어요. 그러다가 주변 권유로 핸드볼 공도 잡아보고 이것저것 일찍부터 경험하게 됐죠. 헌데 키가 부쩍 커지니까 신장을 살릴 수 있는 종목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었고 배구를 한번 해보라는 추천에 일신여상까지 가봤었습니다. 농구 이전에 다른 종목으로 빠질 기회가 여러번 있었죠. 하지만 제대로 배구를 하려면 합숙생활을 해야됐는데 당시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이후 중학교 때 농구 쪽으로 성신여중고로 가려고 했지만 1년 유급을 하라는거에요. 너무 늦게 시작해서 기본기가 부족할테니 1년동안 부족한 것을 최대한 채워보자는 의도였겠죠. 하지만 합숙 거부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성덕여중과 인연이 닿았어요. 여기는 마음에 들었던게 1년 유급도 없으며 합숙생활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덜컥하겠다고 했는데, 이게 웬걸…, 결국은 1년 유급을 시키고 이후 중학교 2학년 때 숙소까지 지어서 합숙생활을 하게 됐어요.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구나 싶었습니다.

Q.늦게 농구를 하게 되어서 초반에는 어려움도 많았을 듯 싶어요.
많았죠. 보통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한 친구들이 대부분인데 그 시절 다 건너뛰고 중학교 들어와서 하려니 처음에 얼마나 헤멨겠어요. 기량적인 부분은 둘째치고 룰숙지도 제대로 안되서 허둥지둥대기 일쑤였어요. 경험이 짧음에도 키가 크다는 이유로 비교적 빠르게 경기에 투입되었죠. 하지만 뭐가 뭔지 몰라서 우당탕탕의 연속이었습니다. 초반에는 파울에 대한 개념도 없어서 이후 어떻게 행동을 해야 될지도 숙지가 안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파울을 하고 자유투 라인에 서는 개그도 보여줬죠. 파울 상황이 일어나면 무조건 자유투를 던져야 되는지 알았어요. 심판이 깜짝 놀라서 네가 아니라 파울을 당한 선수가 자유투를 던진다고 말해줬던 기억도 나요. 경기중 자살골도 넣는 등 하여간 당시 자잘한 해프닝이 정말 많았어요.

 

 

 


Q.성덕여상 당시 대어로 꼽혔는데 국민은행을 택했어요.
당시 성덕여상이 국민은행이랑 연고로 묶인 것도 있었고요. 거기에 더해 1년 먼저 국민은행간 선배가 있었어요. 제가 유급을 하는 바람에 학년은 아래지만 나이는 동갑이었죠. 그 친구가 계속해서 국민은행을 오라는거에요. 거기에 임영보 감독님도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습니다. 결국 이런저런 것이 계속 쌓이다 보니까 언제부터인가는 당연히 국민은행으로 가야 되는가 보다 그렇게 됐죠.

Q.다른 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당시 국민은행은 훈련 강도가 높기로 유명했습니다.
훈련강도야 정말 강했지만 제가 다른 팀 사정까지는 잘 모르니까 국민은행이 최고로 셌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약한 축에는 들지 않았을 것 같지만요. 그것보다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폭언, 폭력, 기합 등으로 악명이 높았죠. 정말 죽을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지만 거기서도 좋은 점은 하나 있었습니다. 감독, 코치님들이 워낙 선수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다 보니까 선수들끼리 관계가 좋았어요. 당시 운동 선후배들끼리는 서열 관계가 확실했거든요. 그런 만큼 후배들을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는 선배도 다수 있었고요. 하지만 저희 국민은행은 그런게 없었어요.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다들 죽을 맛이니까 서로를 의지했던 것입니다. 신인 때 들어가자마자 언니들이 참 잘해줬던 기억이 나요. 남자들 군대 얘기 들어보면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훈련이 힘들면 내무 생활이 편하다’ 저희가 그런 상황이었지 않나 싶어요.

Q.임영보, 김태환 두 감독을 거치셨는데 둘중 어떤 분이 더 무서웠나요?
두분 다 장난아니었죠. 임영보 감독님이 어떤 분인지는 앞에서 조금 언급한 것 같고요. 김태환 감독님도 폭언, 폭행 이런 쪽에서는 만만치 않았는데 그분이 들어오셨을 때 저는 그래도 최고참급이었어요. 그래도 김감독님이 고참 대접은 좀 해주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거의 맞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후배들이 맞는 모습 보는 것도 곤혹이더라고요. 너무 심하게 때린다 싶으면 뒤에서 저도 모르게 ‘에잇! 삐리리 삐리리(순화처리)’하고 저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어요. 그러면 김감독님이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라고 하면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하고 반항조로 대꾸하기도 했죠. 그래도 두분 중에서는 김감독님이 살짝 빈틈은 있었어요. 김감독님같은 경우 기분이 안좋으신 듯 보이면 눈치껏 어깨라도 주물러주면서 코맹맹이 소리라도 하면 통할 때도 간혹 있었어요. 어휴! 임감독님은 그런 것도 없어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포스였다니까요.

 

 


Q.다른 인터뷰에서도 당시 폭언, 폭력에 대한 얘기를 꽤 들었는데 말이 좋아 ‘사랑의 매’라고 포장을 하지 절대 그런 의미는 아니었을 듯 싶어요.
그럼요. 그게 어떻게 사랑의 매입니까. 폭력같은 경우 이해해서도 안되지만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이해한다 쳐요. 하지만 다친 선수들에게 억지로 뛰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제자를 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본인의 명예나 지도자 생활 연장을 위한 것일 뿐이죠. 저도 무릎 연골을 다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와중에 절뚝거리면서 경기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일상생활도 힘들 정도로 정말 아프고 불편했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그 몸으로 어떻게 경기를 뜁니까. 통증을 견디기 힘드니 진통제먹고 대포주사 맞는거죠. 일반인들 같은 경우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런 주사 맞을 일이 없잖아요. 그만큼 몸에 나쁘기도 하고요. 하지만 당시 선수들은 정말 자주 맞았어요. 그리고 아픈 부위에 피도 안 통할 만큼 강하게 테이핑하고 위에 보호대 차고 그러고 경기를 뛰었죠. 누가 봐도 선수를 위한 것은 아니잖아요.

Q.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완전히 회복시켜서 뛰는게 팀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그럴 여유가 없었겠죠. 성적 안나오면 당장 본인이 짤릴 수도 있으니까요. 선수 관절을 갈아서라도 성적을 내야죠. 그분들에게 선수는 소모품일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친 적이 여러번 있었지만 수술까지는 안갔어요. 시즌 종료 후 재활이나 웨이트 트레이닝 등으로 극복했죠. 덕분에 비시즌에도 일상생활을 하는데 힘들었지만요. 손가락 삐고 그런 것은 부상 취급도 안해줘요. 테이프로 손가락 두개를 묶어서 훈련하는 거죠. 아프다고 쉬면 얼마나 눈치를 주는데요. 차라리 죽을 만큼 아파도 뛰는게 나을 정도에요. 그러다 보니 당시 여자선수들은 지금도 손가락 마디가 굵은 선수가 되게 많아요. 제대로 치료가 안되었으니까요. 저도 반지를 못껴요. 손가락에 무리가 가다보니 관절 같은 부분이 어긋나고 그러다 보면 물혹 같은 것도 생겨나더라고요. 저도 쭉 그러고 살다가 4개월전 쯤에 물혹 제거 수술을 받았어요. 관절 어긋나고 그런 것도 바로 잡고요. 그런데 현재도 손가락이 잘 안 구부려져 지네요. 다들 그렇게 선수 생활했어요.(웃음)

Q.그 고생을 하면서도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을테고요.
그렇죠. 그시절은 프로가 아니니까 돈도 은행원들하고 똑같이 받았어요. 호봉수에 따라서 월급이 결정나는 일반 직원들하고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우승하고 그러면 보너스 등은 조금 나왔지만 지옥훈련하고 몸 다 망가진 대가치고는 메리트도 없었죠. 다만 저같은 경우 연고를 맺어서 들어갔기 때문에 팀에 입단할 때 받은 돈이 조금 있었어요. 그것도 아닌 선수들은 그 마저도 없었을 것이고요.

“리바운드 비결요? 안 맞기 위한 이유도 컸습니다”

Q.선수 시절의 플레이 스타일이 궁금합니다.

플레이 스타일이야 앞서 말했다시피 정통센터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고요. 딱 정해진 틀에서 움직이다 보니 특별할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성향이 지는 것을 정말 싫어하고 승부욕이 강했어요. 오죽하면 주변에서 ‘싸움닭’이라고 불렀다니까요. 저희 팀에 신기화라고 뛰어난 슈터가 있었어요. 저희 팀의 외곽화력을 책임지는 선수이다 보니 집중마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이 맞기도 했죠. 코트에 나서면 맞는 것이 일상이었다니까요. 거친 시절이었잖아요. 그러면 제가 가서 대신 복수를 해줬어요.

Q.정말요? 매우 터프하셨네요.
저희팀 동료가 당하는게 싫기도 했고 당시 농구는 그야말로 기세 싸움이었으니까요. 저는 경기장에 들어서면 상대 팀 선배들을 선배로 안 보려고 했어요. 당연히 코트 밖에서는 예의도 지키고 그래야겠지만 경기장에서까지 그러면 제대로 플레이를 할 수가 없잖아요. 경기할 때만큼은 같은 선수라고 생각해야죠. 한번은 코오롱과의 경기에서 상대 선배 언니랑 격하게 말다툼을 한적이 있어요. 당시 저는 연차가 많지 않은 신진급 선수였습니다. 보통 그런 경우는 고참급이나 주장 언니가 나서서 대신 싸워주거나 중재를 하거든요. 당시 저희 주장이 공현자 언니였어요. 근데 저는 막 싸우고 있는데 언니는 한걸음 떨어져서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는 거에요. 경기 끝나고 임감독님에게 언니 엄청 깨졌잖아요. 제가 워낙 코트에서 승부욕이 넘치다 보니까 ‘문주 쟤 정말 싸가지 없다’라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Q.센터라는 포지션 특성상 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당시 센터는 주구장창 경기내내 몸싸움을 해야 되니까요. 일부러 때리려고 하지 않아도 자리 잡고 그러다 보면 서로 팔꿈치로 상대를 때리게 되는 경우도 흔해요. 상대팀 언니가 화내거나 그럴 때도 있지만 거기서 쫄아버리면 정상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가 없잖아요. 거칠게 플레이하는 것은 그 언니도 마찬가지인데요.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하면 ‘제가 뭘요?’라고 다부지게 받아치는 거죠. 저는 제가 농구를 잘했다고 생각은 안해요. 제가 한 것이라면 스크린 걸고 리바운드하고 온갖 궂은일 도맡아서 죽어라 플레이 한 것 뿐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했기에 팀 성적에 도움이 되었고 그로 인해 좋게 봐주신 분들도 많이 생겨난 듯 싶어요. 보시면 제가 마른 체형이에요. 파워형하고는 거기가 멀다고요. 체격이 큰 선수들과 충돌하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악으로 깡으로 했죠.

Q.당시 삼성의 성정아와 라이벌 관계로 불리기도 했어요.
다들 아시다시피 (성)정아 정말 잘하는 선수였죠. 파워도 좋고 센스도 넘치고요. 하지만 라이벌이라고 하기에는 서로 같이 매치업되어서 뛴 경기가 별로 없을거에요. 정아가 부상으로 고생하면서 시기가 많이 엇갈렸거든요. 국가대표팀에서 호흡은 정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아, 그런 것은 있었어요. 정아랑 경기를 뛰면 서로 평소보다 기록이 안나왔어요. 워낙에 상대 플레이 스타일을 잘 알아서 서로 묶이는 경우가 잦았죠. 정아는 골밑플레이도 잘했지만 슛이 정말 정확했어요. 조금 먼 거리에서 쏘는 롱미들슛이 백발백중이었거든요. 무서울 정도로 잘 들어갔던 기억이 나요. 아마 지금 시대에서 뛰었다면 훌륭한 스트레치형 빅맨이 되었을 것 같아요. 워낙 손끝 감각이 좋아서 3점슛도 펑펑 꽂아대는 그림이 연상됩니다. 그래서 아들 이현중이 그렇게 뛰어난 슈터가 된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어쨌거나 정아와 저는 정작 많이 안붙었는데 비슷한 나이대이고 팀끼리도 라이벌 관계가 있어서 언론에서 그렇게 만들어간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Q.현역 시절 상대하기 어려웠던 선수들로는 누가 있을까요?
일단 당장 생각나는 것은 (김)영희 언니에요. 언니가 워낙 크잖아요. 정상적인 수비가 힘든거에요. 악으로 깡으로 한다지만 높이 차이가 너무 큰지라 골 밑에서 자리 뺏기면 그대로 한골먹는거죠 뭐. 평소대로 하다가는 극복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기동성에서 나으니까 빠른 공수전환으로 그 차이를 메우려고 노력했죠. 더불어 몸싸움시에 자세를 최대한 낮춰서 언니의 하체 부분을 계속해서 밀어냈던 기억도 나요. 어차피 상체는 힘들고(웃음)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밸런스를 흔들 수 있으니까요.

Q.1991년에는 농구대잔치 통산 리바운드 1,500개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리바운드를 잘 잡았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비결이라기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했다고 말하는게 맞을 듯 싶어요. 오펜스 리바운드같은 경우는 무조건 프리드로우 라인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간다고 생각했었고요. 디펜스 리바운드는 박스아웃이 키포인트입니다. 경기 중에 비슷한 상황이 10번 나오면 그중에 7번 이상은 상대를 밀어내고 박스아웃 상황을 내 쪽으로 가져갔던 기억이 납니다. 경기중 정말 속상할 때가 박스아웃을 제대로 했는데 공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떨어지지 않을 경우에요. 나중에는 체력이 떨어져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박스아웃에 임하게 되요. 마치 기계처럼. 큰 틀에서보면 리바운드는 비결이고 뭐고 없어요. 평소 죽어라 훈련한 것을 통해 체력과 파워에 더해 왕성한 활동량 거기에 근성이라는 요소가 달라붙는 거죠.

Q.듣기만해도 정말 엄청난 전의를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죠. 전의 거기에 이건 비밀인데요. 당시에는 전반전이 끝나면 탈의실로 선수들을 집합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경기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감독님이 거기로 불러서 막 때리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맞기 싫어서 더 미친 듯이 했다니까요. 경기장에서 몸싸움하고 그런 것이 났지. 경기 중간에 욕설 듣고 맞는 것은 너무 괴롭거든요. 정말 안맞으려고 농구하던 시절입니다. 오죽하면 은퇴 후 제가 석박사 논문 쓸 때 ‘제가 맞은 것에 대해서도 다루고 싶어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거기에 대해서만 써도 책 몇권은 나올 것 같으니까요. 물론 허용이 안되겠지만요. 정말 무식하고 무자비하게 맞았습니다.

 

 


“폭력은 재능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Q.따님은 정말 안맞고 농구하기를 바라실 것 같아요.

당연하죠. 그런 비인간적이고 무식한 방법은 사라져야 하죠. 시대가 바뀌어서 많이 변화하고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듯 싶어요. 제가 현지가 농구를 시작할 때부터 하는 말이 있어요. ‘농구하다가 꿀밤 한대라도 맞으면 택시 타고 바로 집으로 와라’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농구는 계속해야 하고 본인 입장도 있으니까요. 나중에 다른 친구들한테 건너서 들으니까 초등학교 때 많이 맞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이 녀석은 일체 말을 안했어요. 더 슬픈 것은 때린 그 지도자가 저랑 동기에요. 그렇게 맞고 선수 생활 하는 것을 싫어했을 텐데 본인도 지도자가 되어서는 때리는 방식을 택한다는 것이...


Q.결국 자신들이 가장 싫어하던 방식을 되풀이하는 것이네요.
보고 배운게 그런 것이라서요. 어쨌든 요즘은 사람들 인식도 많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예전처럼 그렇게 무식하게는 하지 못할거에요. ‘폭력은 답이 아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고요. 안타까운 것은 과거처럼 막 때리지 못하니까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아요. 속은 부글부글 끓지 막 때리거나 기합 주기는 부담스럽고 그러니까요. 그런데요. 제가 이번에 수피아여고에서 느껴보니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이들에게 동기부여를 만들어낼 수 있겠더라고요. 오히려 칭찬이나 격려를 통해서 성장하게 되면 그것이 더 오래 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체벌은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겠지만요. 저 역시도 특정한 계기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 아닙니까. 생각조차 못하는 지도자도 많을 겁니다. 최근에는 칭찬과 격려에 굶주린 선수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스포츠 심리상담 쪽으로 자격증을 따볼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운동으로 단련된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속내까지 강철은 아니거든요.

Q.정말 그 어떤 인터뷰보다도 폭력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말을 나누다 보니 많은 생각이 드네요.
이건 저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적어도 그 시절의 슬픈 자화상에 대해서 경각심을 느끼고 폭력, 폭언이 얼마나 나쁜 것이다를 알리고 싶어서에요. 그분들은 선수들을 잘하게 만들려고 그랬다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재능을 죽였다는 생각은 안하시는 것 같습니다. 맞지 않으려고 농구하던 선수들이 재능 발휘를 얼마나 했을까요? 그 지옥같은 순간을 견디고 버틴 것은 충분히 대단하지만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는 선수들이 로봇화되어서 재능이 꺾였을 수도 있어요. 더불어 요새 팬서비스가 자주 거론되잖아요. 당시 저희들도 팬들에게 사인도 많이 하고 정말 잘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성원해주고 사랑가득한 눈길을 보내줍니까. 팬들이니까 그렇죠. 당시에는 팬서비스에 대한 개념도 적었지만 그래도 팬들 소중한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다만 팬들과 뭐 즉석 해서 소통을 한다거나 사인이라도 하려고 시간 끌었다가는 들어가서 죽는거에요. 쓸데 없는짓 한다고. 무서워서 그냥 고개만 숙이고 버스에 타는 겁니다. 감독님이 서슬 퍼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누가 감히 팬서비스한다고 나서겠어요.

Q.맞아요. 앞에서 말한 ㅇㅇ언니같이 마음이 여렸던 분은 특히나 더 그랬을 듯 싶습니다.
휴우…, ㅇㅇ언니는 지금도 통화로 임영보 감독님 얘기나오면 눈물부터 쏟습니다. 나이가 60살을 넘었는데 여전히 맞는 꿈을 꾼다고 합니다. 언니 입으로도 말해요.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운동선수를 떠나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버린겁니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때릴 때가 있어요. 그냥 잡지 않아요. 손으로 여자선수 머리칼을 칭칭 감고 시작해요. 그러면 벗어날 수도 없거니와 도망가려고 하면 더 아파요. 그 상태에서 귀싸대기, 발차기 다 들어가는거에요. 계속 때리면서 코트 한바퀴를 돌 때도 있어요. 김태환 감독님도 스킬이 있어요. 줄넘기를 가져와서 주먹에 글러브처럼 칭칭 감아요. 그 주먹으로 때린다니까요. 아무데나 걸리는 데로 복싱 경기하는 거죠. 거기에 엎드려 뻗쳐 한 상태에서 구둣발로 손등 밟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요. 그래도 여자선수들 마음 좋아요. 때 되면 임영보 감독님, 김태환 감독님에게 안부 전하는 제자들도 다수 있거든요. 김감독님에게도 제가 웃으면서 한마디 했죠. ‘감독님은 죄 지은게 너무 많아요. 교회나와서 회개 좀 하세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야, 교회 나가면 예쁜 여자 소개시켜줄거냐?’그러고 농담을 치시더라고요.

Q.안타깝고 슬픈 내용도 있었지만 꼭 필요한 말씀을 많이 해주신 듯 싶어요. 마지막으로 농구인 조문주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릴께요.
일년 전에 남대문시장을 간 적이 있어요. 코로나 시기라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 어떤 상인분께서 ‘조문주 선수 아니세요?’라고 되게 반가워 하는 거에요. 나이도 먹고 마스크도 썼는데 알아봐 주셨다는게 더 신기하고 감사하더라고요. 당시 함께 웃고 울던 팬분들도 같이 나이를 먹었지만 얘기하다 보면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해요. 다른 것은 몰라도 팬분들의 성원과 응원의 목소리는 절대로 잊어 버리지 않고 있답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모두 행복하시고 더운 여름 시원한 일 많이 생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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