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권 넘는 책..퇴임후 力著 10여권 낸 故 이상희 장관 [송의달 LIVE]

송의달 에디터 2022. 8. 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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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8일 오후 5시 노환(老患)으로 영면(永眠)한 고(故) 이상희(李相熙·90) 전 내무·건설부 장관은 여러모로 남달랐던 분입니다. 1932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3년간 농사를 짓다가 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상희 전 건설부, 내무부 장관/뉴스1

이어 성주농고(현 성주고)를 거쳐 고려대 법학과 졸업후 대구 중앙상고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61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습니다. 1991년 건설부 장관을 끝으로 퇴임할 때까지 30년간 관료로 일했습니다.

그동안 1969년 진주 시장을 시작으로 전북 부지사, 경남부지사, 내무부 지방행정국장·기획관리실장, 산림청장, 대구직할시장, 경북도지사, 내무부 차관, 제48·49대 내무부 장관,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한국토지공사 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2012년부터는 대구대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영광학원 이사장도 맡았습니다.

1982년 8월31일 이상희 당시 대구시장이 미국 메이저리그 전설의 홈런타자인 행크 아론에게 명예시민증을 전달한 뒤 악수하고 있다./대구시 제공

◇역대 最高 건설부 장관...장관 세 차례

그의 비범함은 보통 사람은 평생 하나도 하기 힘든 공직(公職)을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장관을 세 차례, 차관과 공기업 사장, 지방자치단체장을 두 차례씩 한 것은 뛰어난 업무 역량과 인품, 사심(私心)없는 일처리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공직자로서 그는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했고 1990년 토지공사 사장으로서 분당, 일산 신도시 설계와 개발에 깊숙히 관여했습니다. 지금 고양 시민들의 자랑이자 명소(名所)인 일산 호수공원은 고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 전경/조선일보DB

정부가 돈을 주고 매입한 99만㎡(약 30만평)의 땅에 물을 끌어와 호수를 만든다는 구상은 당시 대부분이 황당하다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러나 반대를 뚫고 기어이 성사시킨 고인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위스 남부의 레만 호수를 모델로 일산 호수공원을 구상했어요. 땅을 깊게 파 물을 채우고 용궁이 있는 수중공원을 만들 생각이었죠. 호수공원으로 이어지는 시내를 도연명(陶淵明)의 시(詩)에 나오는 무릉도원 같은 풍광으로 조성하는 생각도 했고요. 창덕궁의 부용정을 본떠 호수 한가운데 월영정이라는 정자를 지으면 어떨까 상상도 해 봤지요.”

건설부 장관 시절, 그는 서울~판문점을 잇는 자유로(自由路)도 뚫었습니다. 여러 이유로 사업이 난항을 겪자, 고인은 상폭 50m, 하폭 100m의 1990년 당시 매우 큰 규모의 제방을 세우고 왕복 10차선 규모의 큰 고속도로 계획 안(案)을 냈습니다.

수 천 억원의 건설 비용이 들어 국무회의에서 번번이 부결됐지만, 고인은 군(軍) 병력을 동원하고 군에 중장비를 제공하는 묘수(妙手)로 ‘저비용 조기(早期) 완공’을 해 냈습니다. ‘자유로’는 높은 경제적 효용과 함께 우리의 통일 의지를 과시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상희 전 건설부 장관이 역대 최고의 건설부 장관으로 꼽혔다는 <월간조선> 조사 결과를 보도한 1993년 8월 19일자 조선일보 종합2면 기사/인터넷 캡처

대구시장(1982~85년) 시절 고인은 대구 신천대로와 팔공산 순환도로, 동대구역앞 10차선 도로 같은 인프라 근간(根幹)을 구축했습니다. 그는 40~5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으로 도시 건설행정을 펴 지금도 “탁월한 시장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팔공산을 비롯해 대구 지역 가로수와 녹지 기본 계획도 고인의 손을 거쳐 나왔습니다. ‘지방 행정의 달인(達人)’ ‘도시계획의 선구자’라는 별칭이 붙는 이유입니다.

<월간조선> 1993년 9월호는 “정부 23개 부처의 국장급 이상 간부 300여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이상희 장관이 건설부 장관 가운데 역대 최고로 선정됐다”고 밝혔습니다.

◇책 10만권 소장...全 재산은 2층 단독주택 뿐

힘센 ‘노른자위’ 자리를 20년 넘게 맡았던 고인은 금전 관련 구설수(口舌數) 없이 평생 청빈(淸貧)을 벗 삼아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이달 10일 밤 9시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殯所·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놓아두는 방)에서 기자와 만난 고인의 장남 이영근(57) 한국공항고문의 말입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자택에서 사방 책에 둘러싸여 있는 생전의 이상희 장관 모습/월간조선 제공

“선친께서 대구시장, 경북도지사로 근무하던 무렵, 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유과 장사를 했고 우리 2남2녀 형제들은 그걸 포장해 동네에 배달했어요.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느라 비단 장사도 종종 했어요. 선친께선 ‘공직자는 절대 부동산 투기를 해서는 안된다’며 평생 아파트를 사지 않았어요. 85세 넘어서 어머니 돈으로 두 분이 거처하는 작은 아파트를 생애 처음 마련해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고인은 진주시장을 마친 후 1971년 서울에 올라와 마포구에 작은 일반주택을 마련했었고 85년 성산동 2층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뒤 그곳에서 30년 넘게 살았습니다. 이영근 고문은 “선친께선 평생 책 사고 글 쓰는 것 외에는 취미가 없었어요. 재산이라곤 성산동 집이 유일했습니다. 그런데 선친께서 책 사느라 졌던 빚을 갚고 나니 성산동 집을 팔아도 한 푼도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고인은 1998년 한국애서가클럽이 주는 ‘제7회 올해의 애서가(愛書家)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택가 막다른 골목에 있는 198m²(약 60평) 규모 2층 양옥으로 된 성산동 집에 소장된 책만 10만~11만권에 달했습니다. 반(半)지하 서재에 미로처럼 얽힌 6개 방 마다 지방행정·재정·미술·건축·다리·하천·물·음식·음악·전쟁 등 종류별로 분류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국내 최고의 장서가(藏書家)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고인은 수년 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지하 서고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락거리는데 하루 종일 혼자 이곳에 틀어 박혀 있어도 전혀 심심한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국내 서적은 물론 일본·중국·미국 등 외국 서적들과 조선시대와 한말, 해방 전후에 나온 오래된 책까지 다양했습니다. 조선시대 임금의 교지(敎旨)와 신분증, 일제시대 때 각종 토지 서류, 증명서, 잡지, 지도, 광고와 같은 희귀 자료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빈소에서 만난 미망인 송명자(88) 여사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고인은 공직에 있을 때부터 책을 사고 모으는 데는 우리나라 최고 선수였다. 전국 고서점 주인들이 모두 고인을 알 정도로 탁월한 고서(古書) 수집가였다. 또 4남매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입학하고 졸업할 때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을 정도로 공직에 신명(身命)을 다 바쳤다.”

이상희 前 장관이 <花菴隋錄>(화암수록)을 앞에 놓고 설명하고 있다./월간조선 제공

2006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고인은 “꼭 사야 될 책은 몇 달치 월급을 쏟아 부어서라도 악착스레 샀다.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인 <花菴隋錄(화암수록)>을 구하기 위해 돈을 빌려 1년6개월 동안 갚았다”고 했습니다. <화암수록>은,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養花小錄)>과 더불어 조선시대 2大 원예전문서 중 하나인데, 세상에서 한 권 뿐인 필사본으로 값어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고인은 말년에 보관하던 책 가운데 7만2200여권을 대구 두류도서관에 기증했고, 2019년 3월에는 평생 모은 3500여점의 매화(梅花) 관련 유물을 경북 성주군에 기증했습니다.

◇59세 퇴임 후 독서·저술 몰입...力著 10여권

고인은 애서가나 독서광(讀書狂)을 넘어 여러 권의 명저(名著)를 남긴 저술가이기도 했습니다. 2009년 그가 낸 <술-한국의 술 문화> 2권은 1700쪽 넘는 분량에 주법(酒法)과 주례(酒禮), 주기(酒器), 주호열전(酒豪列傳)은 물론 술 관련 풍류놀이와 술과 술집에 얽힌 일화와 야화를 총망라한 역작(力作)입니다.

1200여 점의 그림과 사진 자료, 동서양의 각종 참고문헌을 인용해 200자 원고지 1만장 분량으로 우리나라의 술 문화를 집대성했다. 총 2권/인터넷 캡처

고인은 “이 책을 내는데 자료 조사에만 10여년, 집필에만 3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술에 관한 1400여점의 그림·사진·도표 등도 담았는데요, 그의 주량은 소주 두 잔 정도일 뿐입니다. 고인의 생전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가져온 술 문화와 풍류를 현대인들이 제대로 알았으면 한다. 우리 술 문화 전반을 통시적으로 다룬 책이 한 권도 없었는데, 이 책은 우리나라 주막(酒幕)에 관한 한 가장 상세한 책이기도 할 것이다.”

그가 66세이던 1998년 출간한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1·2·3권도 마찬가지입니다. 펴서 잠시만 읽어 보면 “대단하다”며 진가(眞價)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뛰어난 책입니다. 4쇄 인쇄후 2015년 개정판을 냈는데 세 권을 합하면 총 1529쪽 분량입니다. 역시 자료 수집에 10년, 집필에 3년이 각각 걸렸다고 합니다. 유혹과 잡념을 물리치고 몰입해야 하며, 취미나 호기심 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깊이있는 고급 서적입니다.

예를 들어 책에는 1000여점 넘는 사진과·그림이 배치돼 있습니다. 또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선현들의 개인 문집을 섭렵해 책 곳곳에 많이 넣었습니다. 문외한(門外漢)으로 꽃 탐구를 시작한 고인은 자료수집 과정을 통해 꽃에 대한 애정과 집념이 전문가 경지에 이르렀다고 밝혔습니다.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총 3권/인터넷 캡처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책 내용의 일부/송의달 기자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참고문헌의 일부/송의달 기자

그는 책을 쓰기 위해 전국의 유적지를 찾아가고 희귀본 소장자를 만나 간곡하게 부탁하며 상당한 비용을 들였다고 합니다. 일본 미야기현 형무소 구내에 핀 조선매(朝鮮梅) 꽃사진 촬영을 위해 수 차례 교섭도 했습니다. 매화와 꽃, 술 문화에 관한 그의 저술은 한국 문화 집대성으로 여느 학자들도 못해낸 일입니다.

1960년대 초부터 내무부에서 지방재정·세정 같은 업무를 한 고인은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지방세제론>, <지방재정론>을 썼습니다. 이어 <파신(波臣)의 눈물>(1999년) <우리 꽃문화 답사기>(1999년) <매화>(2002년) <오늘도 걷는다마는>(2003년) 같은 저서도 냈습니다. 고인은 59세 퇴임한 이후 대다수 책들을 집필·발간했습니다. 나이 들수록 더 왕성하고 집중력있게 활동하는 노익장(老益壯)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상희 전 장관이 임진왜란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가 존경받는 유학자(儒學者)가 된 경남 양산 출신 선비 이진영(李眞榮)의 일대기를 고증을 거쳐 쓴 책이다. 총 414쪽. 1999년 발간돼 2001년까지 3쇄를 찍었다./인터넷 캡처

장남 이영근 고문의 회고입니다.

“선친께서는 차에 타거나 식사할 때도 늘 책을 손에서 때지 않으셨어요. 깨어있는 동안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셨어요. 독서와 저술로 스트레스를 잊으신 것 같아요. 자식들에게는 한 번도 ‘공부하라’ ‘책 읽어라’고 하지 않았고 대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최근까지 10년여 동안 ‘꽃의 상징’에 관한 책을 준비하셨는데 마무리를 못하고 떠나셔서 안타깝습니다.”

◇정치 활동 고사...트리플 30년 인생

고인에게 독서와 책은 호기심이나 수집 벽(癖)을 넘어 업무를 위한 공부이자 통찰력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 때 지방행정과 도시계획을 기록한 문헌, 각종 측량자료 등을 고서점을 다니며 모으는 이유에 대해, 고인은 “역사를 제대로 꿰고 있어야 각 지방 특성에 맞는 행정을 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나무와 꽃에도 관심이 많았던 고인은 수 천권의 식물 관련 서적을 수집했습니다.

2022년 8월10일 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상희 전 장관의 빈소 모습/송의달 기자

수자원공사, 토지공사 사장, 건설부 장관 시절 그는 선진국 사례 수집을 위해 외국에 가지 못하는 대신, 외국 도시 관련 사례에 관한 책을 모조리 모아 섭렵하며 공부했습니다. 도시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세계 각국 유명 도시를 공중 촬영한 사진 화보만 수백 권 수집했습니다. 그에게 책은 일산 호수공원 같은 상상력과 아이디어, 영감(靈感)을 주는 원천이었습니다.

160㎝ 조금 넘는 키의 고인은 소식(小食)·채식으로 하루 2000㎉(칼로리) 이내 영양 섭취를 지키며 건강을 관리했습니다. 공직 퇴임후 여러번 정계 입문을 권유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높은 지명도(知名度)의 고인은 출마만 했으면 당선이 확실했으나 스스로 분수를 알고 본인 만의 ‘길’을 걸었습니다.

고(故) 이상희 장관의 90년 생애는 세 번의 30년으로 나눠집니다. 첫 30년에서 그는 빈농(貧農) 집안이란 실존적 한계를 각고의 노력으로 이겨냈습니다. 두 번째 30년에선 공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세 차례 장관을 지내고 ‘역대 최고 장관’이 됐습니다.

고 이상희 전 건설부 장관의 최근 생전 모습. 제6대 산림청장으로서 2022년 7월 '산림문학인의 날' 유튜뷰에 출연해 대담하고 있다./유튜브 캡처

마지막 30년에는 관심을 품은 주제에 대한 천착(穿鑿)과 꾸준한 저술로 역사성과 전문성을 갖춘 불후(不朽)의 저작을 다수 남겼습니다. 고인은 2016년 대구시 직원 대상 특강에서 “끊임없이 공부하는 공무원이 돼야 한다. 공직자라면 최소한 5~10년 후를 내다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100세 인생 시대’에 그의 역정은 신선한 자극과 감화를 주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인향만리’(人香萬里·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의 모범(模範)이자 사표(師表)인 고인을 계속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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