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저버려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류애 위한 투쟁"

김여진 2022. 8. 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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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파친코' 이민진 소설가
26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차 방한 모국·고향의 본질적 의미 포착
장편 '파친코' 전세계 문단 주목 원산 출신 부친과 속초 동행도
▲ 제26회 만해대상 시상식이 최근 인제 하늘내린센터에서 개최, 만해평화대상은 우쓰미 아이코일본 게이센여학원대 명예교수, 실천대상은 탄경스님(다나 대표)과 이상묵 서울대 교수, 문예대상은 유자효 시인과 이민진 소설가가 공동 수상했다.

최근 새로 나온 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의 개정 번역판에는 작가의 사인과 함께 친필로 이런 문구가 써 있다. ‘우리는 강한 가족입니다(We are a powerful family)’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고향’, ‘모국’, ‘가족’, ‘역사’와 같은 큰 덩어리의 단어들이 페이지들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다.

19세기 영미문학 스타일의 전지적 작가 시점 작법과 빠른 전개 덕분에 술술 읽히지만, ‘선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가족의 굴곡진 여정을 함께 하며 상당한 감정의 변화도 마주해야 한다. 전세계 독자들은 선하고, 숭고하며, 강직한 인물들에게 빠져들었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사를 다룬 이민진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 ‘파친코’는 2017년 출간 후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르고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BBC 선정 ‘올해의 책 10’ 등에 꼽히며 많은 화제를 낳았다. 국내에서는 개정 번역판이 지난달 말 출간, 온오프라인 베스트셀러를 휩쓸고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플TV+ 드라마 동명의 드라마도 올 초 윤여정·이민호 등의 주연으로 방영, 국내외에서 주목받으며 세계적 작가로서의 명성을 더욱 높이게 됐다.

“한용운 시집 영문판 모두 탐독
만해 같은 인물 수백만 명 필요
상처 딛고 일어난 힘 잊지 말길”

▲ 이민진 소설가

한국과 미국은 물론 세계 문단의 중심에 선 이민진(사진) 작가를 지난 12일 강원도 인제에서 만났다.

그가 문예 부문에서 수상한 제26회 만해대상 시상식 직후다. 대기실에는 북강원도 원산 출신 부친과 부산 출신 모친, 사촌인 배우 김혜은씨 등 가족들도 함께였다.

“지역 언론을 좋아한다(I love local press)”고 인사한 이 작가는 강원도 방문 소감에 대해 “감동을 느낀다. 마음이 충만한 느낌”이라며 “강원도가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첫 방문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고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수상소감에서 부친이 북강원도 원산 출신임을 먼저 알린 그에게 ‘강원도 패밀리’라고 하자 “맞아요(Yes I am!)”하고 웃었다.

이 작가는 만해대상 수상 소식을 접한 후 줄곧 만해의 정신에 대해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한용운의 시집 영문번역판을 찾아 모두 읽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stunning). 그의 열망이 느껴지는 감동적이고 아주 현대적인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별과 상실감에서 오는 강렬한 감정으로 채워진 만해문학의 정신을 언급했다. 수상소감에서도 “세상이 망가지고 복구해야 할 때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데 큰 창의력이 필요하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 이웃,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만해와 같은 사람이 수백만명 필요하다”고 했다.

이 작가는 “태어난 곳을 떠나고 모국어를 잃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 크게 느꼈다”고 고백했다. 또 “평범한 사람은 처음 태어난 곳과 시간으로 정의되지만, 이후에는 가족, 관계, 일로 뻗어 나가게 된다. 제가 종교나 계급·정치·이민·빈곤·인종·난민·자기 결정 등에 대해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쁘다”고 했다.

‘파친코’는 국가, 역사, 정치 지도자들을 믿지 않고, 가족과 이웃간 연대와 애정으로 역사의 파고를 헤쳐 나가는 강인한 한국인의 대서사시다. 하지만 작가는 ‘애국심’의 가치도 놓치지 않았다.

특히 조국을 돕기 위해 일본에서 북한행을 택하는 인물 ‘김창호’에 애정을 표했다. 집필을 위해 저널리스트 못지 않게 방대한 양의 취재를 끈질기게 한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많은 서류들을 보며 슬플 때가 많았다. 선함을 믿고, 나라를 위한 결정을 내렸지만 예상과 다른 결말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 특히 그랬다”고 덧붙였다. 이날 만해대상 시상식에서 진행된 국기에 대한 경례나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등의 의례에 대해서도 “아름답다”고 했다.

이번 수상을 위해 방한한 이 작가는 부모님과의 마지막 한국 여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족들과 동행했다. 그 사이 북콘서트와 기자간담회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국대사 등도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이 작가와의 만남을 SNS에 올리며 수상을 축하하고 문학적 업적을 소개했다.

강원도 일정도 가족들과 함께 한 그는 속초에서 지난 주말을 보냈다. 실향민 출신의 부친에게 동해바다를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가족과 함께 가는 속초여행에 대해 “냉면을 꼭 먹을 것”이라고 설렘을 숨기지 않은 그는 지난 13일 자신의 SNS에 속초바다 풍경을 올리며 “빛나는 속초에서 인사를 보낸다. 강원도의 아름다운 도시를 곧 떠나야 하지만 언젠가 다시 와서 오래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고 쓰기도 했다.

어머니 고향 부산 배경의 작품을 썼으니, 부친 강원도에 대한 얘기를 쓸 계획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모르겠지만 지켜보자”며 여지를 남겼다.

이 작가는 오는 25일 개정판 2권 출간을 앞두고 있으며 새 소설 ‘아메리칸 학원(American HAGWON)’을 집필 중이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파친코’에 이은 한국인 3부작이다.

강원도민을 비롯해 분단과 전쟁 등 역사의 상처가 남아있는 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부탁했다.

“고통만큼 살아남기 위해 벌였던 투쟁과 저항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했던 굴욕 보다는 인류애를 위해 해 온 모든 방식의 노력을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만큼은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죠.”

김여진 beatle@kado.net

◇이민진= 1968년 서울 출생. 1976년 부모의 이민을 따라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예일대 역사학과와 조지타운대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로 일했으나,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그만뒀다. 19세 때 대학특강에서 따돌림 등 에 못이겨 스스로 세상을 등진 재일 조선인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 30여년간의 구상과 치밀한 취재 끝에 ‘파친코’를 내놨다. 2004년 단편 ‘조국(MOTHERLAND)’ 등을 발표해 주목받기 시작했고, 2008년 미국 이민자를 소재로 한 첫 장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으로 전미 편집자들이 뽑은 올해의 책, 미국 픽션 부문 ‘비치상’ 등을 수상했다. 경계인으로서의 시선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포착,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을 잇는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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