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럼] 우크라이나에서 얻은 귀중한 경험

국제신문 2022. 8. 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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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에서 의대를 다니던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싸우면 금세 승리할 거라는 생각에 들뜬 상태로 친구들과 자원입대했다.

그림= 서상균 기자


몇 주간 군사훈련을 받고 수류탄을 던지는 척탄병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됐다. 그러나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북해에서 남쪽 스위스까지 길게 이어지는 참호 속에서 굶주리고 지쳐갔다. 어느 날 벨기에 해안에서 작전을 펼치던 도마크는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철모가 날아가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철모에 의해 머리가 찢어진 상처여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뇌 손상이 염려됐다.

베를린으로 후송된 도마크는 치료받은 후 이번에는 동부전선에 투입됐다. 의대에 다닌 경력으로 척탄병에서 의무병으로 바뀌었다. 도마크는 지금 폴란드 제2의 도시 크라쿠프를 거쳐 우크라이나에 있는 야전병원에서 2년간 근무했다. 부상병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도마크는 의사의 수술을 거들었다. 전쟁으로 넘쳐나는 환자들 속에 쉴 틈 없이 일했다. 종종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돌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가장 심한 것은 가스괴저였다. 절단 수술 후 감염으로 가스괴저에 걸리면 근육 조직이 썩었다. 그러면 썩은 피가 심한 악취를 내며 새어 나오면서 가스가 발생했다. 가스괴저가 발생하면 또다시 절단 수술을 해야 했고 심하면 죽고 말았다. 원인은 세균 ‘클로스트리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도마크는 몸속에 들어온 세균을 없애기 위한 연구를 했다. 그는 색깔을 내는 염료와 설폰아마이드라는 화합물을 합친 물질의 약효를 실험했다. 프론토실이라는 염료가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쥐를 치료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약은 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설파제라고 불리게 됐다. 동물실험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효능을 보이자 세균감염증 치료에 자신을 가지게 됐다. 1935년 도마크의 6살 난 딸이 세균에 감염된 자수바늘에 손을 찔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감염은 급속도로 퍼졌고 혈액 독성이 심각했다. 의사는 생명이 위급하니 딸의 팔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도마크는 프론토실을 딸에게 주사했다. 그러자 기적적으로 회복됐다.

당시에는 상처를 통해 침투한 세균이 몸에 병을 일으켜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소독약은 세균 예방에는 도움이 되지만, 감염된 상처에 바르면 세균뿐만 아니라 세균을 죽이는 백혈구까지 없애 상태가 더 나빠졌다. 전쟁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보다 상처를 입어 세균감염으로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연구가 진행돼 약효를 내는 것은 색소가 아니라 설파닐아마이드라는 것이 밝혀졌다. 프론토실을 주사하면 피부가 붉게 변했는데, 설파닐아마이드만 사용해도 항균 효과가 있었고 피부색이 변하지 않았다.

설파제 개발로 도마크는 1939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됐다. 하지만 이때는 히틀러가 독일인이 노벨상을 받는 것을 금지했던 시기였다. 1935년 스웨덴 노벨 위원회가 유대인 평화주의 작가 칼 오시에츠키를 평화상 수여자로 선정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는 도마크를 감옥에 넣고 노벨상을 거절할 것을 강요했다. 어쩔 수 없이 포기 사인을 한 도마크는 전쟁이 끝나고 1947년에야 노벨상을 받았다.


설파제는 감염병으로부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1936년에는 설파닐아마이드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아들의 생명을 살렸다. 또 다른 설파제 설파피리딘은 폐렴에 걸린 윈스턴 처칠을 치료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미군에게 상처가 나면 뿌리는 가루약으로 지급돼 전장에서의 감염을 막았다. 세균에 감염되면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젊은 시절 우크라이나에서의 생활이 귀중한 경험이 돼 페니실린이 나오기 이전에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현재는 더 좋은 약이 많아 사용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설파제는 페니실린 이전의 명약이라고 할 수 있다.

정승규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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